광연루(廣延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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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창덕궁에서 군신(君臣)이 모여 연회하던 누각.

개설

1405년(태종 5) 태종이 창덕궁을 시어궁으로 삼으면서 새로이 조성한 누각이다.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의 동북쪽에는 해온정(解慍亭), 동남쪽에는 광연루가 마련되었는데 주로 종친과 신하를 불러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태종실록』 6년 4월 1일).

광연루는 경회루(慶會樓)에 버금가는 누각으로 조성한 흔적이 있으나 연못의 규모가 경회루보다는 작았다(『태종실록』13년 4월 12일). 2층으로 구성되어 신하들을 시험하거나 소대하는 일은 광연루의 아래서 이루어졌고, 연회나 구경은 누각의 위에서 이루어졌다. 광연루의 아래에는 부용각이라는 부속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동쪽 수강궁(壽康宮)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낙선재(落善齋) 근처로 추정된다. 사신을 접대하고 연향을 베풀며 군신과 종친이 함께하는 놀이 공간으로 쓰였고, 태종이 광연루 아래 별전에서 승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연못을 파 연꽃을 옮겨 심고 주변에 아름다운 화목을 심어 정원을 조성하여, 꽃구경하며 소요하는 장소로도 쓰였다(『태종실록』 9년 3월 26일)(『태종실록』 11년 6월 14일). 누각에서 격구와 활쏘기를 즐기며 연향을 베푼 일이 잦았던 것으로 보아 궁궐 한쪽 너른 공간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동자를 모아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변천 및 현황

단종 때 피서할 별실을 광연루 옛터에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있어, 단종 이전에 광연루가 소실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조 때에는 광연루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거사할 것을 알아채고 미리 세자를 그 자리에 참석치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으로 보아 새로 별실을 세워 광연루로 호칭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성종 때 신하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잔치한 기록을 끝으로 광연루의 쓰임은 보이지 않는데, 1484년(성종 15)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철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형태

건물 앞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2층의 규모로 지어져 위·아래층을 함께 사용했던 누각으로 추정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태종 때 광연루의 아래층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조공할 처녀를 왕과 왕비가 직접 선발하였고 처녀의 아버지들을 불러 음식을 내려 주었다.

세종의 모후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수강궁에서 승하하자 광연루와 수강궁의 근처인 명빈전(明嬪殿)에 빈소를 마련하고 세종은 광연루 동쪽, 한 칸 집에서 머물려고[居廬] 하였다. 그러나 큰비가 오고 물이 넘쳐 광연루 아래로 옮겨 머물렀다(『세종실록』 2년 7월 7일)[ 『세종실록』 2년 7월 13일 3번째기사].

참고문헌

  • 『속동문선(續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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