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중(南正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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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3년(효종 4)∼1704년(숙종 30) = 52세.]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정랑(正郞)⋅충청도 감사(監司)⋅경상도 감사(監司)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참판(參判)이다. 아명(兒名)은 석산(石山)이고, 자(字)는 백진(伯珍)이고, 호(號)는 기봉(碁峰)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남용익(南龍翼)이고, 어머니 채씨(蔡氏)는 사헌부 지평(持平)채성구(蔡聖龜)의 딸이다. 도승지(都承知)이인환(李寅煥)의 사위이고, 형조 판서남유용(南有容)의 조부이고, 영의정남공철(南公轍)의 증조부이다. 노론(老論)의 김창협(金昌協)⋅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81년(숙종 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682년(숙종 8)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노론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소론의 거두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함께 복직시키도록 청하였다. 그 뒤에 남정중은 나이가 많았으므로,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서, 내시 교관(敎官), 사도시 주부(主簿), 호조 좌랑(佐郎), 포천현감(抱川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7세였다.[<문과방목>] 그러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을 조정에서 추방하였는데, 남정중은 아버지 이조 판서남용익(南龍翼)와 함께 파직되었다.

1691년(숙종 17) 아버지 남용익은 서인의 중진이었으므로,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는데, 외아들 남정중이 아버지를 따라가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1692년(숙종 18) 아버지는 북방 지역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며 병을 얻어서 그해 2월에 유배지 명천에서 돌아갔다. 이에 남정중은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 양주(楊州)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고 선산(先山)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하고 장희빈(張禧嬪)이 폐출되자,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도당(都堂)에서 장차 홍문관에 임용할 인재를 미리 선발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하였는데, 남정중은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민진후(閔鎭厚) 등과 함께 16명이 뽑혔다.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해운판관(海運判官)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

1695년(숙종 21)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

1696년(숙종 22) 강원도양양현감(襄陽縣監)으로 나가서, 금강산(金剛山)과 동해안을 유람하였다. 그해 말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97년(숙종 23)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조태채(趙泰采)와 함께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698년(숙종 24)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다시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이때 조태구는 이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여름에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황해도 여러 고을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그 뒤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1699년(숙종 25)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

1700년(숙종 26)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는데, 그때 『대전속록(大典續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다시 편찬하기 위하여 설치한 찬수청(撰修廳)의 낭관(郎官)에 임명되었다.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장악원 정(正)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공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양주(楊州)에 가까운 고을의 원으로 옮겨주기를 원하였으나, 그해 말에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자, 부임하지 않고 사직하였다. 이에 숙종이 다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하였다.

1701년(숙종 27)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을 사사(賜死)하자, 장희빈이 낳은 세자(世子: 경종)를 보호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의 싸움이 격화되었다. 다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남정중은 당파 싸움에 다시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선영(先塋)이 있는 고향 양주(楊州)로 돌아갔다. 그 뒤에 천안군수(天安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전라도 화순능주목사(綾州牧使)에 임명되자, 잠깐 부임하였다가, 바로 사임하였다.

1704년(숙종 30) 지병으로 양주의 고향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2세였다.

문집으로는 『기봉집(碁峰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온화(溫和)하고 후덕(厚德)하였다. 또 부모를 섬기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 때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를 섬길 때에 부모 앞에서 항상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부모가 물러가라는 명령이 없으면, 감히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조정에서 나랏일을 논의할 때 같은 당이든지 다른 당이든지 가리지 않고 오로지 시비(是非)가 옳은 지와 그른 지만을 따져 물을 만큼 공평하였다.[묘지명]

남정중은 1653년(효종 4) 6월 9일에 서울 집에서 아버지 남용익(南龍翼)과 어머니 채씨(蔡氏)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너그럽고 믿음직하여, 아버지가 어린아이 때 이름을 석산(石山)이라고 불렀다. 남정중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과 다투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대한 기상이 있다고 보고, 항상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글자로써 가르쳤다. 번거롭게 책을 가르치고 글을 억지로 외우게 하는 것보다 글자를 한자 한자 점차 깨우쳐서 스스로 글귀를 만들어 나가도록 하였다.[행장] 남정중은 나이 15세 때에 경주이씨(慶州李氏)와 혼인하였고, 나이 23세 때에 아들 남한기(南漢紀)를 낳았다. 나이 29세 때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682년(숙종 8) 남정중이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그 소두(疏頭)가 되어 숙종에게 상소하여,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소론의 거두 박세채를 함께 복직시켜서 노론과 소론이 연합 정권을 수립하도록 청하였는데, 숙종이 가납(嘉納)하였다. 그때 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의 비문 때문에 스승 송시열과 그 제자 윤증(尹拯)이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벌리고 서로 대립하자, 서인의 노장층은 스승 송시열을 지지하고, 서인의 소장층은 제자 윤증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1683년(숙종 9)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졌는데, 노장층은 스승 송시열을 지지하여 노론이 되었고, 소장층은 윤증을 지지하여 소론이 되었다. 남정중은 노론의 중진 김창협(金昌協)⋅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으므로, 남정중은 노론에 속하였으나, 숙종 후기에 노론과 소론이 치열한 당파 싸움을 벌일 때에, 그는 가능한 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1697년(숙종 23) 5월에 경연(經筵)에서 시강관(侍講官)남정중과 조태채 등이 노론의 이정명(李鼎命)과 이건명(李健命)을 체임시키고 파직한 일을 거론하고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을 경계하도록 진달하니, 숙종이 옳게 여겼다. 그때 노론의 이건명 등이 소론의 중진들을 비판하고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1700년(숙종 26) 12월에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자, 삼척부사(三陟府使)남정중이 상소해서, 어머니의 나이가 일흔이라고 핑계되며, 충청도 관찰사에서 체직해 주기를 청하니, 숙종이 남정중의 상소를 이조(吏曹)에 내려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당시 남정중이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을 피하여 벼슬을 그만두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사헌부에서 남정중을 탄핵하기를, “남정중은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군수(郡守)로 나가기를 청한 곳은 경기의 동쪽 고을이었습니다. 남정중이 만약 어머니의 병 때문에 멀리 가기가 어렵다면, 글을 올려서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더라도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남정중은 이제 막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옮기자마자, 곧장 사직하고자 하니, 이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이조의 당상관을 추고(推考)하게 하고, 남정중은 체차(遞差)하게 하소서.”하니, 숙종은 사헌부에서 이조의 당상관을 추고(推考)하자는 건의만을 따라서 이조의 당상관을 추고하게 하였다. 그 뒤에 이조에서 남정중의 상소를 복주(覆奏)하니, 숙종이 남정중의 체차를 허락하였다. 이에 남정중은 고향 양주(楊州)로 돌아와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조용하게 살게 되었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해곡(東海谷)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지수재집(知守齋集)』 권9, 『기봉집(碁峯集)』 권4] 아들 남한기(南漢紀)가 지은 행장(行狀)과 손자 남유용(南有容)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기봉집(碁峯集)』에 실려 있다.[『기봉집(碁峯集)』 권4]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도승지(都承知)이인환(李寅煥)의 딸인데,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 아들 진사(進士)남한기(南漢紀)은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를 지냈고, 장녀는 정랑(正郞)이정엽(李廷燁)에게, 차녀는 사인(士人) 이창조(李昌朝)에게, 삼녀는 판관(判官)홍우집(洪禹集)에게, 사녀는 대사간(大司諫)이도겸(李道謙)에게, 오녀는 진사(進士)정석명(鄭錫命)에게, 육녀는 사헌부 장령(掌令)민익수(閔翼洙)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 남유용(南有容)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大提學)과 형조 판서(判書)를 지냈고, 증손자 남공철(南公轍)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가오고략(嘉梧藁略)』
  • 『강한집(江漢集)』
  • 『검재집(儉齋集)』
  • 『기봉집(碁峯集)』
  • 『기언(記言)』
  • 『기옹집(寄翁集)』
  • 『남계집(南溪集)』
  • 『뇌연집(雷淵集)』
  • 『도곡집(陶谷集)』
  • 『매간집(梅澗集)』
  • 『명곡집(明谷集)』
  • 『몽와집(夢窩集)』
  • 『무명자집(無名子集)』
  • 『병산집(屛山集)』
  • 『석재고(碩齋稿)』
  • 『손와유고(損窩遺稿)』
  • 『양와집(養窩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옥오재집(玉吾齋集)』
  • 『우사집(雩沙集)』 『이우당집(二憂堂集)』
  • 『장암집(丈巖集)』 『정암집(貞菴集)』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지수재집(知守齋集)』
  • 『태화자고(太華子稿)』
  • 『허백정집(虛白亭集)』
  • 『호곡집(壺谷集)』
  • 『후산집(后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