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南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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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1년(세종 23)∼1468년(예종 즉위) = 28세.] 조선 전기 세조~예종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공조 판서이고, 봉작(封爵)은 적개(敵愾) 1등 공신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아버지는 주부(主簿)남빈(南份)이고,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현감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아버지 남빈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와 태종(太宗)의 막내딸 정선공주(貞善公主: 세종의 누이동생)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나이에 일찍 죽었기 때문에 양부 서귀수(徐貴守)의 집에서 자랐다. 조선 개국공신 영의정남재(南在)의 현손(玄孫)이고, 세조를 옹립한 정난(靖難) 1등 공신(功臣) 좌의정권람(權擥: 1416~1465)의 사위였으나, 권신 권람이 죽은 뒤에 부인 권씨(權氏)와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을 평정하고, 뒤이어 <건주위(建州衛) 오랑캐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하여 용맹을 떨쳤다. 19세의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에 의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훈구 공신파 원상(院相)들이 있었다.

세조 시대 활동

1460년(세조 6)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정난(靖難) 1등 공신(功臣) 좌의정권람(權擥)의 사위였으므로, 바로 선전관(宣傳官)에 보임되었다.

1463년(세조 9) 선전관(宣傳官)으로서, 함경도 체찰사(體察使)한명회(韓明澮)의 군관(軍官)에 임명되어, 장인 권람의 절친한 친구인 체찰사한명회를 도와서 함경도의 6진(鎭)을 진무(鎭撫)하였다.

1465년(세조 11) 2월에 장인 권람(權擥)이 50세의 나이로 돌아갔으나, 1466년(세조 12) 세조가 특별히 발영시(拔英試)를 실시하여 젊은 영재를 뽑았는데, 그때 나이 26세의 한창 때 남이가 다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무과방목>]

1467년(세조 13) 2월에 세조가 취로정(醉露亭)에서 군사들의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영의정한명회(韓明澮))⋅병조 판서김국광(金國光)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이때 포천(抱川))⋅영평(永平) 등지에서 도적떼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다는 말을 듣고, 세조가 즉석에서 남이 등을 불러서 도적떼를 잡게 하고, 도승지신면(申㴐: 신숙주의 아들)에게 명하여 그 고을에서 군사를 뽑아서 남이 등의 지휘에 따라서 도적떼를 소탕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3년 2월 14일 2번째기사] 그때 세조는 신숙주⋅한명회 등의 훈구 공신 앞에서 그의 이종 4촌 남빈(南份)의 아들인 외척(外戚) 남이에게 한번 그 장수의 자질을 시험하였는데, 남이는 세조의 기대만큼 도적떼를 신속하게 소탕하고 용맹을 크게 떨쳤다. 그해 5월에 함길도 길주(吉州) 출신 이시애(李施愛) 형제가 함길도의 토호(土豪)들을 선동하여 북병사(北兵使)강효문(康孝文)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중앙 정부에서 호패법(號牌法)을 강화하자, 함길도 호족들이 각자 관할하는 백성들이 본고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함길도 편맹(編氓: 호적에 편입된 백성)은 세종 때 남방에서 이주시킨 사민(徙民)과 귀화한 토착 여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때 이시애는 세조에게 권신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 등이 함경도의 군사를 동원해서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세조와 훈구 공신파를 이간시켰다.

이에 세조는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하여 3만여 명의 정벌군을 조직할 때 훈구 공신 세력을 제외하고 종친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세조의 조카)과 외척인 남이(南怡)를 중심으로 군사 편제를 편성하였다. 구성군 이준(李浚)을 도총사(都摠使)에 임명하고 호조 판서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副摠使)로 삼고,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를 대장(大將)으로 삼았다. 이시애가 길주(吉州)에서 2만 명의 반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함흥을 점령하고 함길도 관찰사신면(申㴐: 신숙주 아들)을 죽였으나, 구성군 이준의 정벌군이 함흥으로 진격하자, 이시애는 후퇴하여 산세가 험한 북청에 진을 쳤다. 구성군 이준의 정벌군이 주춤하자, 세조가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에게 3천 명의 정예방을 이끌고 북청의 이시애 군사를 선제공격하게 하였다. 그해 7월에 대장남이가 이숙기(李淑琦)와 함께 선봉장이 되어 반군의 목채(木寨)를 쳐부수고 돌격하여 이시애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렸다. 북청의 싸움에서 남이가 적진 앞에 출몰(出沒)하면서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우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반군이 마구 쓰러졌다. 이에 북청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자, 이시애는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시애 형제는 배반한 부하에게 붙잡혀, 정벌군에게 넘겨져서 참형에 처해졌다. 그해 8월에 <이시애의 반란>은 4개월 만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남이가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北靑)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자, 세조가 남이를 부호군(副護軍)에 임명하였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뒤에 호군(護軍)으로 승진시켜서 종성(鍾城)에 주둔하여 온성(穩城)⋅경원(慶原)⋅경흥(慶興) 등지를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이시애 반란을 정벌한 전공으로 남이는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책훈되었다. 그해 9월에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요동도사(遼東都事)가 요동의 군사를 동원하여, 남만주 일대를 지배하는 건주위(建州衛) 도지휘(都指揮)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도 파병하여 협격(挾擊)하도록 요청해 왔다. 이에 세조는 우참찬 윤필상(尹弼商)을 평안도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하여 정벌군을 조직하게 하고, 대장(大將)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에게 함길도에 주둔한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집결하여, 정벌군을 다시 편성하여, 건주(建州) 여진 오랑캐족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세조는 강순에게 주장(主將)을 맡게 하고 남이를 초자(超資)하여 중추원 동지사(同知事)로 임명하였다. 그해 9월 말에 우상(右廂) 대장남이는 압록강을 건너서 파저강(潑猪江)을 따라서 진격하다가, 강가의 산채(山寨)를 습격하여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참살하고 수많은 오랑캐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좌상(左廂) 대장어유소는 이만주의 본거지로 알려진 올미부(兀彌府)를 습격하여 수많은 오랑캐를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그해 10월에 부호군 고태필(高台弼)을 명나라에 보내어 첩보(捷報)를 알리기를, “성화(成化) 3년 9월 14일 요동 백호(遼東百戶) 백옹(白顒)이 건주위(建州衛)를 협공(挾攻)하자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으므로, 중추부 지사(知事)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남이(南怡) 등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화(成化) 3년 9월 25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두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이달 29일에 건주(建州)의 동북쪽 파저강[潑猪江]의 이만주(李滿住) 등이 사는 모든 산채(山寨)를 공격하고, 30일에 올미부(兀彌府)의 산채(山寨)를 공격하여 이만주와 그 아들 이고납합(李古納哈) 등 2백 86명을 참살하고, 이만주와 이고납합의 처 등 남녀 아울러 23명을 사로잡았고, 말 17필과 소 10두를 얻었고, 우마(牛馬) 2백 29마리를 죽였고, 여사(廬舍) 1백 95좌와 그들의 곡식을 쌓아둔 2백 17곳을 불태워버리고 그 가산(家産)을 몰수하였으며,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요동(遼東) 동녕위(東寧衛)의 남자 1명과 부녀자 6명을 얻어서 금년 10월 초4일에 돌아왔습니다.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포로와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중국 사람들은 요동(遼東)에 교부합니다.” 하였다.[『세조실록』 13년 10월 21일 2번째기사] 이것을 명나라에서는 <성화(成化) 3년의 역(役)>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정벌군은 명나라 군사와 협격(挾擊)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이만주 본거지를 습격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이만주는 조선 초기에 만주에서 국가에 준하는 세력을 결집하였기 때문에, 남이의 업적은 만주에서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미리 막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해 10월에 북정(北征)에 참여한 대장(大將)중추부 지사(知事)어유소(魚有沼)⋅중추부 동지사(同知事)남이가 와서 복명(復命)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경들이 두 차례나 정벌에 참여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하고 어유소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세조가 남이에게 타이르기를, “너는 이미 공신(功臣)에 봉해졌는데, 또 큰 공을 세웠다. 다만 남에게 자랑하는 마음만을 가지지 말라.” 하였다. 세조는 남이가 자기의 공을 과시하는 것을 경계하였는데, 남이가 자기 공을 자랑하고 과시하다가 마침내 남의 미움을 받아서 비운(悲運)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11월에 세조는 중추부 동지사남이에게 사복장(司僕將)을 겸임하게 하여 왕궁을 호위하는 책임을 맡겼다. 그해 12월에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한 전공을 의논하여 강순(康純)⋅윤필상(尹弼商)을 1등으로 삼아서 2자급(資級)을 초자(超資)하여 노비(奴婢) 10구를 하사하고, 어유소(魚有沼)⋅남이 등을 2등으로 삼아서 1자급을 초자(超資)하고 노비 8구를 하사하였다. 이때 세조는 남이를 공조 판서(判書)에 임명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1468년(세조 14) 1월에 세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중궁(中宮)과 함께 세자(世子: 예종)를 거느리고 온양(溫陽)으로 거둥하였는데, 공조 판서남이를 후상 대장(後廂大將)으로 삼아서 어가(御駕)를 호위하게 하였다. 그해 2월에 공조 판서남이가 어머니를 만나보기 위하여 휴가를 청하니, 세조가 역말[馹]을 타고 가게 하였다. 그해 3월에 공조 판서남이가 무과 회시(會試)에 곧바로 나아가기를 청하니, 세조가 허락하였는데, 대간에서 남이가 두 번이나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다시 장원하지 못하면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진언하자,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잘못 생각하여 남이에게 중시(重試)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시험에 나아가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세조실록』 14년 3월 27일 1번째기사] 그해 4월에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제(成化帝)가 사신을 보내어 건주위(建州衛)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한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에게 각각 은(銀) 20냥(兩), 각종 저사(紵絲)와 비단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이에 남이는 더욱 자기의 공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과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공신 훈구파 대신들의 미움을 더욱 사게 되었다.

그해 5월에 세조가 서현정(序賢亭)에 나아가서 사후(射侯: 활쏘기를 구경하는 것)하였는데, 남이는 대장(大將)이라고 하여 젊은 무사(武士)들을 멸시하였으나, 이날 남이가 여러 번 활을 쏘아도 과녁을 제대로 맞히지 못하자, 세조가 혀를 차고 웃었다. 그때 세자(世子: 예종)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등이 입시(入侍)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남이가 술에 취(醉)하여 세조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구성군 이준(李浚)을 지나치게 사랑하는데,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하니,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구성군은 나의 지친(至親)이고 또 큰 공(功)이 있는데, 내가 구성군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누구를 사랑하겠는가.”하고, 남이를 끌어내어 의금부의 옥(獄)에 가두게 하였다. 다음날 세조가 남이를 의금부의 옥에서 석방하고, 사복장의 지위에서 해직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젊고 용맹한 남이를 몹시 사랑하고 신임하였다.이에 공조 판서남이가 세조를 찾아가서 권람(權擥)의 딸 권씨(權氏)와 이혼하고 다시 취처(娶妻)하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자, 세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해 7월에 세조가 20대의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강순(康純)을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으로 삼고, 남이(南怡)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게 하였다. 그해 8월에 세조가 남이(南怡)를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임명하였는데, 강맹경(姜孟卿)⋅한계희(韓繼禧) 등 훈구 공신파 대신들이 속으로 크게 불평하였다.

예종 시대 활동

1468년(예종 즉위) 9월 세조가 52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19세의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강희맹(姜希孟) 등이 원상(院相)이 되어, 어린 예종의 정사를 도왔는데, 의산군(宜山君) 남이(南怡)를 그대로 병조 판서로 삼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 앞서 세조가 남이를 병조 판서에 임명하였을 때 형조 판서강희맹이 중추부 지사(知事)한계희(韓繼禧)에게 말하기를, “남이의 사람됨이 병사(兵事)를 맡기기에는 마땅치 못하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한계희가 예종에게 강맹경의 말을 그대로 아뢰자, 예종이 남이를 병조 판서에서 해직하고 의산군(宜山君)으로서 사복장(司僕將)을 겸임하게 하였다. 예종은 세자 때부터 거칠고 사나운 남이를 몹시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그해 10월에 병조 참지(參知)유자광(柳子光)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비밀히 무고하여, <남이(南怡)의 옥사>가 일어났다. 남이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평소 자기를 아껴주던 영의정강순(康純)을 옥사에 무고하게 끌고 들어갔는데, 영의정강순이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도 구원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였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27일에 남이는 강순, 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량(文孝良)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으로 처형되었는데, 향년이 28세였다.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된 사람들은 모두 남이와 평소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날 남이의 어머니 홍씨(洪氏)도 거열형으로 처형되었다. 대개 역적(逆賊)의 가족은 적몰(籍沒)되어 관비(官婢)가 되는 것이 보통인데, 남이의 어머니가 아들의 뒤를 따라서 거열형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남이의 집과 재산은 몰수되고, 그 딸은 적몰되어 공신 한명회(韓明澮) 집에 노비로 하사되었다. 그때 남이의 잔당으로 지목된 조숙(趙叔)과 맹불생(孟佛生)⋅진소근지(陳小斤知)⋅이산(李山) 등이 도망하였으나, 그 뒤에 모조리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예종의 명으로 남이(南怡)의 집을 유자광(柳子光)에게 하사하였다.

<이시애의 반란>의 진압과 <건주 여진의 대추장 이만주>의 정벌

1467년(세조 13) 5월에 함길도 길주 토반(土班)인 이시애(李施愛) 형제가 함경도의 토호(土豪)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세조에게 권신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 등이 함경도의 군사를 동원해서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 함길도 병마사강효문(康孝文) 등을 잡아 죽이고 길주(吉州)를 점령하였다.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정난(靖難) 1등 공신 신숙주와 한명회 등을 하옥시키고,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하여 함경도 주변의 4도(道)에서 3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군을 조직할 때 훈구 공신 세력을 제외하고 종친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과 외척인 남이(南怡)를 중심으로 군사 편제를 편성하였다. 구성군 이준(李浚)은 세종의 넷째왕자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아들이므로, 세조의 조카이고, 남이는 세종의 막내여동생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손자였다. 세조는 구성군 이준(李浚)을 함길도·강원도·평안도·황해도의 4도 병마 도총사(兵馬都摠使)에 임명하고 호조 판서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副摠使)로 심고, 허종(許琮)을 함길도 병마사로 삼고,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을 대장(大將)으로 삼아서, 3만 명의 정벌군을 이끌고 함경도 함흥으로 향해 출발하게 하였다.

이시애는 길주에서 남하하여 함흥을 점령하고 새로 함길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한 신숙주의 아들 신면(申)을 잡아 죽이고 체찰사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반군이 함길도를 모두 차지하고 그 기세가 높아지자, 구성군 이준은 정벌군을 이끌고 철원까지 나아갔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도총사구성군 이준은 군사를 지휘하는 데에 경험이 부족하여, 부총사조석문(曺錫文)이 사실상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해 7월에 이시애가 반군 2만 명을 산세가 험한 북청에 포진시키자, 세조가 전황을 보고 받고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에게 3천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북청의 이시애 군사를 선제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진북장군 강순은 밤중에 산개령(山介嶺)을 넘고, 대장어유소(魚有沼)가 종개령(鍾介嶺)을 넘어 북청의 이시애 본진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강순이 남이와 이숙기(李淑琦)를 선봉장으로 삼아 종개동(鍾介洞)에 이르니, 반군이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북청(北靑) 출신 반군 1백여 명이 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남이가 앞장서서 먼저 목채(木寨)를 쳐부수고 돌격하여 반군 2명을 참수하고 20여 명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잔당(殘黨)들이 모두 도주하였다. 이에 1진의 강순의 군사와 2진의 어유소 군사가 북청으로 들어가서 이시애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렸다. 북청의 싸움에서 남이가 적진 앞에 출몰(出沒)하면서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우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반군이 마구 쓰러졌고, 남이는 몸에 4, 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이때 이숙기도 맹활약을 하였다. 북청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시애는 후퇴하다가 심복 부하에게 붙잡혀서 정벌군에 넘겨졌다. 도총사구성군 이준이 본영에서 이시애 형제를 참형에 처하여, <이시애의 반란>은 4개월 만에 겨우 평정되었다.

세조는 도총사구성군 이준의 승전 보고를 받고 목숨을 내걸고 싸워서 가장 전공이 많은 남이를 즉시 부호군(副護軍)에 임명하였고, 또 힘써 싸워서 전공이 많은 이숙기를 아울러 당상관(堂上官)으로 승품시켜서 전공을 포상하였다. 북청(北靑)의 싸움에 참가한 여러 군사(軍士)들이 모두 전공이 있었으나, 남이⋅이숙기만이 홀로 포상(褒賞)을 먼저 받았다고 불평하자, 진북장군 강순이 휘하 군사들의 전공의 등급을 매겨서 도총사구성군 이준에게 보고하니, 도총사구성군 이준이 이를 세조에게 치계(馳啓)하였다. 세조는 참전 군사(軍士)들에게 포상하고, 남이를 호군(護軍)으로 승진시켰다. 또 세조는 강순을 함길도 방어사에 임명하고, 대장어유소(魚有沼)에게는 1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鏡城)에 주둔하여, 길주(吉州)⋅부령(富寧)⋅회령(會寧)을 진무하게 하고, 대장남이에게는 1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종성(鍾城)에 주둔하여, 온성(穩城)⋅경원(慶原)⋅경흥(慶興)을 진무하게 하였다. 세조 초기에 함경도 사람들은 좌의정김종서(金宗瑞)의 심복 함길도 병마사이징옥(李澄玉)의 반란을 지지하여 세조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세조 말기에도 함길도 백성들은 이시애의 반란을 지지하여 세조에게 다시 저항하였으므로, 세조는 대장남이와 어유소에게 두만강 유역의 6진(鎭)을 진무하고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세조는 6진의 토착 여진이 두만강 유역의 오도리[斡朶里]족과 압록강 유역의 오랑캐[兀良哈]족과 손을 잡고 침입할까봐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때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 요동의 군사와 조선의 정벌군이 함께 파저강(婆猪江: 지금의 동가강)의 오랑캐족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명나라에서 만주 지역을 건주(建州) 여진과 해서(海西) 여진과 야인(野人) 여진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 요동도사(遼東都事)가 통제하였으나, 만주 북부 지역에 살던 해서 여진과 야인 여진은 거의 통제하지 못하고, 만주 남부 지역에 살던 건주 여진의 오랑캐족과 오도리족을 겨우 통제할 수 있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는 오랑캐족의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건주위(建州衛) 도지휘(都指揮)에 임명하여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 오랑캐족과 두만강 유역의 동여진 오도리족을 아울러 통솔하게 하였다. 명나라 정통제(正統帝) 때 명나라 지배력이 약화되자, 오랑캐족의 대추장 이만주가 오도리족의 대추장 동맹가 티무르[童猛哥帖木兒]와 손을 잡고 조선을 자주 침입하자, 세종이 최윤덕(崔潤德) 장군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만주를 정벌하고, 압록강 상류에 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무창(茂昌)의 4군(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이만주는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 뒤에 성화제(成化帝) 때 파저강(婆猪江)의 이만주가 조선과 요동 지방을 자주 침입하여 약탈하자, 조선에서는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4군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에 세조는 호군(護軍)남이를 서울로 불러서 북방의 사정을 자세히 물어보고, 추위를 대비하여 겨울 의복을 군사들에게 내려주었다. 또 세조는 호군남이에게 명하여 우찬성(右贊成)김국광(金國光)⋅우참찬(右參贊)윤필상(尹弼商) 등과 함께 도총부(都摠府)에 모여서 참전한 군사들의 전공을 등급 별로 나누어 정하게 하였다. 이에 남이는 이준(李浚)과 조석문(曹錫文)⋅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이숙기(李淑琦) 등과 함께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훈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호군남이는 함길도 종성(鐘城)으로 돌아갔는데,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요동(遼東) 백호(百戶)백옹(白顒)을 보내어 조선에서 정벌군을 보내어 명나라 군사와 함께 파저강(婆猪江)의 이만주를 협격(挾擊)할 것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사신 백옹은 조선의 정벌군을 따라서 파저강의 이만주의 본거지로 가려고 평양에 머물렀다. 이에 세조는 평안도 감사를 시켜서 명나라 사신 백옹에게 조선의 장수는 대장(大將)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이고, 정벌군의 규모는 1만 명이라고 통보하게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을 평안도 선위사(宣慰使)로 삼아서 정벌군을 후방에서 지원하게 하고, 남이를 초자(超資)하여 중추원 동지사(同知事)로 임명하였다.

그해 9월에 주장(主將) 강순⋅대장남이가 본진(本陣)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여, 9월 24일에 압록강을 건너고, 9월 25일에 대장어유소(魚有沼)의 선발 군사와 황성평(皇城平)에서 만나서 군사의 편제를 정돈하고, 이만주의 본거지 올미부(兀彌府)로 행군하였다. 9월 26일에 주장 강순과 우상(右廂) 대장남이(南怡)가 만포진(滿浦鎭)에서부터 파저강(婆猪江)을 따라서 행군하여 강가에 있는 이만주의 산채(山寨)를 공격하여 이만주(李滿住)와 이고납합(李古納哈) 부자 등 24명을 참살(慘殺)하고, 이만주와 이고납합의 처자(妻子)와 부녀자 24명을 사로잡고, 활로 사살(射殺)한 자가 1백 75명이고, 중국인 포로 6명과 병기⋅우마 등을 거두고 가사(家舍)와 곡식을 쌓아둔 곳을 불태웠다. 산채에서 물러나서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요동(遼東)의 명나라 군사를 여러 날 동안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10월 초2일에 군사를 돌이켜 초3일에 압록강을 건너서 돌아왔다. 좌상(左廂) 대장어유소(魚有沼)는 고사리(高沙里)로부터 올미부(兀彌府: 우라 산성)로 들어가서 산채(山寨)를 공격하여 오랑캐 21명의 목을 베고, 활로 사살한 자가 50명이고, 중국 포로 1명과 병기⋅우마를 거두고 가사(家舍) 97채를 불태우고, 또한 요동(遼東)의 명나라 군사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10월 초4일에 압록강을 건너서 돌아왔다.

오랑캐족의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는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가 출현하기 이전에 만주에서 국가에 준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던 인물이었다. 그의 딸을 영락제(永樂帝)에게 바치고 건주위(建州衛)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임명되어, 두만강 유역에 있던 오도리족의 대추장 동맹가 티무르[童猛哥帖木兒]와 만주족의 패권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동맹가 티무르가 야인(野人) 여진의 습격을 받고 비명횡사(非命橫死)하여 두만강 일대에 힘이 공백이 생기자, 조선의 세종은 이 틈을 타서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6진(鎭)을 개척하였고, 이만주는 동여진 오도리족을 흡수 통합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세종이 최윤덕(崔潤德) 장군을 보내어 이만주를 정벌하고 압록강에 4군(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만주는 명나라 세력을 뒤에 업고 조선과 싸우면서 서여진 오랑캐족과 동여진 오도리족을 통일하여 만주의 민족국가를 세울 정도로 그 세력이 강성하였다. 남이와 강순의 정벌은 만주에서 금(金)나라⋅청(淸)나라와 같은 민족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미리 막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선조가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에게 누루하치의 오도리족 본거지 헤투하라[興京老城]를 정벌하라고 명령하였을 때 북병사이일은 핑계를 대고 누르하치를 정벌하지 않았던 사실과 대비가 된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거칠고 사납고 용감하였다. 남이는 싸울 때 특별히 용맹성을 발휘하여 남보다 앞장서서 싸웠다. <이시애의 반란>의 진압과 <건주(建州) 여진 대추장 이만주(李滿住)>의 정벌 때에 남이는 선봉장이 되어서 용맹하게 싸웠으므로 적개(敵愾) 1등 공신으로 책훈되었다. 세조는 남이의 용맹성을 사랑하여 초자(超資)하여 사복장(司僕將)과 병조 판서(判書)에 임명하였으나, 당시 어린 세자 예종은 거칠고 사나운 남이를 몹시 싫어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9월에 세조가 돌아가고 나이 19세의 예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때마침 하늘에 혜성이 자주 나타났다. 남이는 대궐 안에서 숙직하다가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다른 사람과 말하기를, “혜성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배치하는 형상을 나타내는 별이다.” 하였다. 병조 참지(參知)유자광은 평소에 남이의 재능과 명성이 높아서 벼슬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것을 몹시 시기했는데, 이날도 대궐에 들어가서 숙직하다가, 벽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서 그 말을 엿들었다. 유자광은 곧 남이의 말에 거짓말을 보태고 남이가 일찍이 지은 시(詩)를 그 증거로 삼아서, 남이가 반역을 꾀한다고 비밀히 무고(誣告)하여, 마침내 <남이의 옥사>가 일어났다. 남이가 일찍이 만주의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하기 위하여 강순(康純)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백두산을 넘어갈 때 대장부의 기개(氣槪)를 시로 읊기를,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어지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지도다[豆滿江波飮馬無].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男兒二十未平國], 뒷세상에 그 누가 나를 대장부라고 하겠는가[後世誰稱大丈夫].” 하였다. 유자광은 남이가 이때부터 반역을 도모하여 나라를 차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남이가 체포되어 국문(鞫問)을 당할 때에 영의정강순(康純)이 직책상 추국청(推鞫廳)에 들어가서 참관하였는데, 남이가 강순을 노려보고, “강순도 이 모의에 참여했습니다.” 하였다. 강순이 놀라서 말하기를, “신은 본래 평민으로서 밝으신 임금을 만나서,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렀는데, 또 무엇을 얻으려고 남이의 역모에 참여했겠습니까.” 하니, 예종이 그렇게 여기었다. 남이가 다시 아뢰기를, “전하께서 그의 숨기는 말을 믿고 그 죄를 면해 준다면, 어찌 죄인을 찾아 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예종이 강순도 국문하게 하니, 강순은 나이가 이미 80여 세였으므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하여, 남이와 함께 죽었다. 강순이 고문을 당하며 울부짖기를, “남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이렇게 무함하느냐.”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원통한 것은 나와 당신이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영의정이 되어 나의 원통한 것을 알고도 말 한 마디 없이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이제 원통하게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였다. 강순은 입을 다문 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거열형(車裂刑)을 당할 적에 강순이 남이를 돌아보며 한탄하기를, “젊은 아이 녀석과 잘 지낸 탓에 이런 화를 당하는구나.” 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남이는 강순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동하며, 강순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서 용맹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남이의 옥사는 허구 날조되었으므로, 강순이 남이 옥사에 참여하였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예종은 추국청에서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 등 36명을 익대 공신(翊戴功臣)으로 책봉하고 죄수의 집안에서 몰수한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남이가 살던 집은 역적의 집이라고 하여 그 집을 허물고 연못을 파서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샤머니즘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冤魂)이 저승을 가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고 있기 때문에 신으로 모시면 영험(靈驗)이 있다고 믿었다. 대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비운(悲運)의 죽음을 당한 유명한 무장(武將)을 신으로 많이 모시는데, 고려의 최영(崔瑩) 장군과 조선의 남이(南怡) 장군⋅김덕령(金德齡) 장군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이 장군을 모시는 신당(神堂)과 사당(祠堂)이 전국에 여러 곳에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106번지에 있는 남이장군 사당이며, 이곳에서 열리는 당제(堂祭)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10월 1일에 남이 장군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전야제를 열고 큰 굿판을 벌여서 주민들의 근심과 걱정을 해소하고 주민들의 복을 비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지역 주민의 민속신앙으로 되었다. 남이 장군의 신통력은 그 부인 권씨(權氏)와의 혼인과 이혼의 설화와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남이 장군의 비극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민간 설화에 전하기를, “남이가 젊었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보자기 위에 하얀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 귀신을 보지 못하였다. 남이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서 그들이 가는 대로 따라 갔더니, 그 종은 어떤 재상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그 집안에서 사람의 우는 소리가 나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 집 작은 아씨가 별안간에 죽었다고 하였다.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아씨를 살릴 수 있다.’ 하자, 그 집에서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허락하였다. 남이가 방문에 열고 들어가 보니, 하얀 분을 바른 귀신이 아씨의 가슴을 타고 앉았다가, 남이를 보는 즉시 달아났는데, 그러자 아씨는 숨을 쉬고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나오자 아씨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남이가 묻기를, ‘어린 종이 가져온 상자 속에 무슨 물건이 있었는가.’하니, ‘홍시가 있었는데, 아씨가 감을 좋아하여 먼저 이를 먹다가, 숨이 막혀서 넘어갔습니다.’ 하였다. 남이는 자기가 본 대로 상세히 말하고 귀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마침내 그 아씨가 살아났다. 그 아씨가 바로 좌의정 권람(權擥)의 넷째 딸이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남이와 권람의 딸이 가까워져서 좋은 날짜를 잡아서 혼인하였다.”고 한다.[『국조기사(國朝記事)』] 이 민간 설화에서 남이와 권람의 딸이 매파를 통하지 않고 직접 만나서 연애 결혼한 사실과 남이가 귀신을 볼 수 있는 초능력과 귀신을 쫓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민간 설화에서 전하기를, “일찍이 권람(權擥)이 딸이 있어서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을 하였다. 권람이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쟁이가 점괘를 보며 말하기를, ‘이 분은 반드시 나이 젊어서 죽을 것이니, 점괘가 좋지 못합니다.’ 하였다. 권람이 자기 딸의 운명을 보게 하였더니, 점쟁이가 점괘를 보며 말하기를, ‘이 분의 수명은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을 것이지만, 자기 복(福)을 누리고 화(禍)를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괜찮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권람은 그 점쟁이의 점괘에 따라서 남이와 자기 딸을 혼인시켰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사랑을 극진히 받았으나, 28세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옥사(獄事)로써 사형을 당했는데, 권람의 딸은 이미 그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고 한다.[『부계기문(涪溪記聞)』] 이 설화에서는 남이와 권람의 딸이 중매결혼을 하였고, 이미 점괘에서 두 사람은 서로 비운에 죽을 운명을 알고 혼인하였다. 남이는 권씨(權氏)와 혼인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므로, 현실은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점괘와는 달랐다. 나중에 남이가 권람의 딸과 정식으로 이혼하고 그가 사랑하였던 탁문아(卓文兒)와 다시 혼인하려고 한 것은 자기 운명에서 한번 벗어나 보려고 시도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남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고 양부 서귀수(徐貴守)의 집에서 자랐다. 그 뒤에 어머니 홍씨(洪氏)가 외아들 남이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그 모자 관계가 너무 가까워서 주변 사람들이 남이와 어머니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관가에 밀고까지 하였다.[『부계기문(涪溪記聞)』] 남이는 점차 용맹을 떨치고 유명한 인물이 되자, 탁문아(卓文兒)라는 기녀(妓女)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첩(妾)으로 들이었다. 이에 남이는 부인 권씨와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장인 권람이 죽은 지 3년이 지나서, 1468년(세조 14) 5월에 공조 판서남이가 세조에게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함길도에 정벌하러 나갔을 때에 신의 어머니가 질병이 있어서, 신이 아내를 만나보려고 사람을 시켜서 불렀는데, 신의 아내가 대답하기를, ‘집안의 천첩(賤妾)을 쫓아낸 다음에야 가서 보겠습니다.’하며, 끝내 가서 만나보지 않았고, 또 신이 다시 북방(北方)에 나가 있을 때에도 아내는 사람을 보내어 위문(慰問)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시어머니에게 불효하고 또 지아비에게 불순(不順)하여 부녀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원컨대 다시 취처(娶妻)하도록 하여 하소서.”하니, 세조가 어찰(御札)로 허락하기를, “의리가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하니, 깊이 생각하여 그대의 임의대로 하라.” 하였다. 이에 남이는 부인 권씨와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그때 남이의 어머니가 성격이 포악하여 며느리로 하여금 아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게 하여, 당시 사람들의 의논이 분분(紛紛)하였는데, 누구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세조실록』 14년 5월 25일 3번째기사]

남이의 장인 권람(權擥)은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세조의 정난(靖難) 1등 공신으로서 세조 시대에 훈구 공신파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다. 세조가 왕권(王權)을 강화하기 위하여 훈구 공신 세력을 억제하려고 종실 외척 세력인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영의정에, 남이를 병조 판서에 임명하였는데, 이때 훈구 공신파 대신과 종친 외척 세력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또 좌의정권람이 죽고 난 직후에 남이가 권람의 딸 권씨(權氏)와 정식으로 이혼하자, 훈구 공신파 대신들이 남이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세조가 죽고 어린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권력을 잡은 훈구 공신파의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이 종신 외척파의 실세인 병조 판서남이(南怡)를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자광(柳子光)이 남이를 무고하여 <남이의 옥사>를 일으킨 배경에는 훈구 공신파 세력이 있었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 뒤에 훈구 공신파 세력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과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와 권력을 다투다가, 이른바 <4대 사화(士禍)>를 일으켜서 사림파의 신진 유학자들을 일망타진하고, 명종 때까지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선조가 즉위하여 성리학을 중시하는 사림파의 유학자를 등용하기 시작하자, 문장(文章)을 중시하는 훈구 공신파는 자연히 소멸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남양부(南陽府) 북쪽 대전리(大田里)에 있는 장군총(將軍塚)이 남이의 묘소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의 남이 장군 묘소가 바로 장군총이다. 또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남이섬에도 돌무덤과 추모비가 있다. 장군총과 돌무덤은 후세에 만든 가묘(假墓)이다.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이 지은 <남이장군 시장(諡狀)>이 남아 있고,[『성재집(性齋集)』 권32]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가 지은 『남이군 전(傳)』이 남아 있다.[『해좌집(海左集)』 권39권]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좌의정권람(權擥)의 딸인데, 세조의 허락을 받아서 이혼하였다.[<방목>] 외동딸 남구을금(南求乙金)이 있었는데, <남이의 옥사> 때 여종이 되어 공신(功臣) 한명회(韓明澮) 집에 하사되었다. 한명회가 절친한 친구 권람의 외손녀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자기 집 여종으로 하사받았던 것 같다. 이듬해 정희대비(貞熹大妃: 세조의 왕후)가 권람의 공적을 참작하여 남굴금을 노예의 신분에서 풀어주었다. 이에 남굴금은 외가 권람의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녀의 생모 권씨는 그 앞서 이미 죽었다고 한다. 남이가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지 350년 만에 1818년(순조 18) 3월에 우의정남공철(南公轍)이 순조에게 남이의 억울한 옥사(獄事)를 신원(伸寃)해 주도록 간청하여, 남이는 강순과 함께 사면되어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그 뒤에 또 1백여 년이 지나서, 1910년(순종 3)에 나라에서 남이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詩號)를 내려주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순종]
  • 『무과방목(武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강한집(江漢集)』
  • 『계당집(溪堂集)』
  • 『국조기사(國朝記事)』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금릉집(金陵集)』
  • 『기언(記言)』
  • 『기재잡기(寄齋雜記)』
  • 『기축록(己丑錄)』
  • 『나재집(懶齋集)』
  • 『눌재집(訥齋集)』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담정유고(藫庭遺藁)』
  • 『대동기문(大東奇聞)』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문선(東文選)』
  • 『명곡집(明谷集)』
  • 『문곡집(文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미호집(渼湖集)』
  • 『병산집(屛山集)』
  • 『보한재집(保閑齋集)』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가집(四佳集)』
  • 『사숙재집(私淑齋集)』
  • 『삼연집(三淵集)』
  • 『삼탄집(三灘集)』
  • 『석북집(石北集)』
  • 『선원계보(璿源系譜)』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재유고(醒齋遺稿)』
  • 『성재집(性齋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사집(松沙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식우집(拭疣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암서집(巖棲集)』
  • 『어우집(於于集)』
  • 『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
  • 『역대요람(歷代要覽)』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총화(慵齋叢話)』
  • 『운양집(雲養集)』
  • 『은대조례(銀臺條例)』
  • 『음애일기(陰崖日記)』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이암유고(頤庵遺稿)』
  • 『인재집(寅齋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입암집(立巖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정유각집(貞㽔閣集)』
  • 『조천기(朝天記)』
  • 『지봉유설(芝峯類說)』
  • 『지퇴당집(知退堂集)』
  • 『지호집(芝湖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팔곡집(八谷集)』
  • 『하서집(荷棲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
  • 『해좌집(海左集)』
  • 『허백당집(虛白堂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