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연성(郭連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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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년미상∼1464년(세조 10).] 조선 전기 단종~세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경상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이고, 봉작(封爵)은 청평군(淸平君)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자(字)는 보지(保之)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단종 시대 활동

처음에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다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서 대군을 수행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모의할 당시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집에 있었으나, 세조가 권남(權擥)으로 하여금 곽연성을 모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그 공을 인정받아 1453년(단종 1)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호군(護軍)이 되었고, 1456년(세조 2) 겸 군기부정(兼軍器副正)을 거쳐서, 겸 사복윤(兼司僕尹)에 임명되었다.

1457년(세조 3) 무과(武科)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무과방목>] 이어 중추원 첨지사(僉知事)가 되었고, 곧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458년(세조 4) 인순부윤(仁順府尹)과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다.

1459년(세조 5) 중추원 부사(副使)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세조 6) 명나라에서 돌아와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도절제사가 되어 외방으로 나갔다.

1463년(세조 9)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는데, 이듬해 12월 25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성질이 거칠고 난폭하고 탐오(貪汚)하고 혹독하였다. 곽연성이 경상도의 절제사(節制使)가 되었을 때, 이인(吏人) 승로(承老)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주 부자였으나, 늙고 아들은 없이, 겨우 6~7세 된 첩(妾)의 딸만 있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곽연성은 광포한 무리들을 시켜서 승로를 갑자기 군영(軍營)에 강제로 가두고, 엉터리 문권(文券)을 만들어 그에게 묵은 빚으로 갚도록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괴롭혔다. 얼마 후 승로와 그 딸이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었으나, 곽연성은 그 빚을 그대로 징수하였다. 곽연성은 군사들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혹독하게 형벌을 가중시켰는데, 심지어 피패(皮牌)로 뺨을 때리고 나무 몽둥이로 머리통을 때리니, 군사들이 그를 시호(豺虎)처럼 무서워하였다. 노복(奴僕) 가운데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몽둥이가 크건 작건 크기를 가리지 않고 때렸으므로 심지어 죽은 자도 있었다. 그는 재산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으므로 곽연성에게 돈을 빌린 사람은 감히 갚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첩(妾)이 두 명 있었는데, 임종 할 때 앞에 불러다 놓고 재산을 나눠 주었다. 그 중 관기(官妓)인 작은 첩의 손을 붙잡고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것이다.”라고 하면서, 베개 밑에 넣어둔 칼을 가지고 첩의 눈을 찌르려고 하였는데, 그 첩이 얼른 피하면서 이마에만 상처를 입었다.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무과방목(武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