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임일(睦林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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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6년(인조 24)∼1716년(숙종 42) = 71세.]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旨)⋅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이다. 자(字)는 사백(士伯)이고, 호(號)는 만오당(晩悟堂)⋅청헌(靑軒)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좌의정목내선(睦來善)이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통덕랑(通德郞) 윤창언(尹昌言)의 딸이다. 한성부 우윤(右尹)목서흠(睦敍欽)의 손자이고, 병조 판서(判書)목창명(睦昌明)의 6촌 동생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사마방목>]

1678년(숙종 4)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고, 남인(南人)이 축출당하자, 남인의 중진인 아버지 목내선(睦來善)도 호조 판서(判書)로 있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였다.

1681년(숙종 7) 목임일은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평안도 지방을 염찰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영의정김수항(金壽恒)이 숙종에게 목임일의 비행을 고하였는데, 목임일이 평안도에 암행어사로 나가서 역마(驛馬)를 타고 찰방(察訪)과 함께 산사(山寺)를 돌아다니며, 연포회(軟泡會: 꼬치에 꿴 두부를 닭국에 익혀서 먹는 모임)를 열었다고 하였다. 목일임은 서인들의 정적인 목내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임일은 홍문록(弘文錄)에 선임되었다.

1682년(숙종 8)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683년(숙종 9) 홍문관 수찬으로 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686년(숙종 12)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1687년(숙종 13) 8도(道)에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 다시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1688년(숙종 14) 다시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이 축출되자, 아버지 목내선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목임일은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이조 좌랑(佐郎)이 되었다가, 이조 정랑(正郎)이 되었고,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을 거쳐, 응교(應敎)가 되었다.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그때 승지목임일이 심단(沈檀)⋅민언량(閔彦良) 등과 함께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고 장희빈(張禧嬪)을 왕비로 추대하였는데, 숙종의 바라는 바를 실행한 것이다.

1690년(숙종 16) 승지(承旨)로 있다가,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다시 승지가 되었다.

1691년(숙종 17)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승지를 거쳐,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1692년(숙종 18)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아버지 목내선이 좌의정이고 아들 목임일이 도승지가 되자, 목내선 부자(父子)가 남인 정권의 실세로 되었다.

1693년(숙종 19)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參判)을 거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1694년(숙종 20) 도승지로 있다가,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잡고, 남인들이 축출당하였는데, 아버지 좌의정목내선은 절도(絶島)에 유배되었고, 아들 도승지목임일은 남해현(南海縣)으로 유배되었다.

1695년(숙종 21) 소론의 영의정남구만(南九萬)이 왕명을 받고 유배된 남인을 석방할 때 목임일은 남해에서 풀려났으나, 아버지 목내선은 충청도 당진(唐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돌아가자, 숙종이 일찍이 장희빈을 왕비로 삼자고 주장한 목임일과 심단⋅민언량 등을 먼 곳으로 유배시키라고 명하여, 다시 전라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1704년(숙종 30) 사유(赦宥)를 받고 장흥의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성품

숙종이 일찍이 목임일을 평하기를, “사람과 물건을 해치지 못할 착한 사람이다.”고 하였다.

부인과 후손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예조 참판우창적(禹昌績)의 딸인데,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목천현(睦天顯)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고, 차남 목천임(睦天任)은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直長)을 지냈고, 삼남 목천광(睦天光)은 진사(進士)이고, 사남 목천운(睦天運)은 생원(生員)이며, 장녀는 호군(護軍)강필신(姜必愼)에게, 차녀는 호군(護軍)이중환(李重煥)에게, 삼녀는 진사(進士)유뇌(柳耒)에게 각각 시집갔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62]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재집(艮齋集)』
  • 『갈암집(葛庵集)』
  • 『갑봉유고(甲峰遺稿)』
  • 『경현재집(警弦齋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남파집(南坡集)』
  • 『도곡집(陶谷集)』
  • 『만정당집(晩靜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모헌집(慕軒集)』
  • 『무명자집(無名子集)』
  • 『북헌집(北軒集)』
  • 『삼연집(三淵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재집(疎齋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식암유고(息庵遺稿)』
  • 『야당유고(野堂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봉집(一峯集)』
  • 『지촌집(芝村集)』
  • 『퇴당집(退堂集)』
  • 『팔오헌집(八吾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