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공(南以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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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5년(명종 20)∼1640년(인조 18) = 76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이조 판서(判書)⋅공조 판서이다. 자(字)는 자안(子安)이고, 호(號)는 설사(雪簑)이다. 초명은 남이경(南以敬)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개성부 도사(都事)남호(南琥)이고, 어머니 신씨(愼氏)는 사간원 사간(司諫)신사헌(愼思獻)의 딸이다. 남병사(南兵使)남응운(南應雲)의 손자이고, 병조 참판(參判)남이신(南以信)의 동생이다. 도승지(都承旨)남근(南瑾)의 조카이고, 이조 판서남이웅(南以雄)의 4촌 형이다. 동인(東人)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누어질 때 북인(北人)의 분당을 주도하였고, 북인이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누어질 때 소북(小北)의 영수가 되었고, 소북(小北)이 청탁(淸濁)으로 나누어질 때 청소북(淸小北)의 우두머리가 되어 속칭 ‘남당(南黨)이라고 불리었다. 후추(後瘳) 김신국(金藎國)과 가장 가깝게 지내며 항상 동고동락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이들 일파를 ‘김남당(金南黨)’이라고 불렀다.

선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 23) 증광(增廣) 문과에 갑과(甲科) 1등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문과방목>]

1591년(선조 24)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질 때 유성룡(柳成龍)을 공격하고 이산해(李山海)를 지지하여 북인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까지 피난 갔다.

1593년(선조 26)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594년(선조 27) 평안도 조도어사(調度御史)가 되어 각 고을의 군사와 군량미를 점검하였다.

1595년(선조 28) 사헌부 지평(持平)이 임명되었다가, 도체찰사(都體察使)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1596년(선조 29)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그해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다시 도체찰사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어, 경상도로 내려가서, 육군과 수군을 함께 독려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승진하였다.

1598년(선조 31)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이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북인(北人)의 강경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남인(南人)의 영수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정권을 잡았는데, 그때 영의정유성룡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자, 왜적과 화의하려고 한다는 의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1599년(선조 32)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북인 홍여순(洪汝諄)을 대사헌에 임용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북인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는데, 대북은 이산해⋅홍여순⋅정인홍⋅이이첨 등 기존 세력이었고, 소북은 유영경(柳永慶)⋅남이공⋅김신국(金藎國)⋅유희분(柳希奮: 광해군의 처남) 등 신진 세력이었다. 선조 말년에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폐위하고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자, 소북의 영수 유영경은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7년 동안 정권을 잡았으나, 대북의 정인홍⋅이이첨 등은 이에 반대하고 광해군을 지지하다가 실각하였다. 영의정유영경이 자기 세력을 확대하려고 무분별하게 사람을 등용하자, 남이공은 이를 반대하여 유영경을 공격하다가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에 소북은 유영경을 영수로 하는 탁소북(濁小北)과 남이공을 영수로 하는 청소북(淸小北)으로 나누어졌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의 이이첨과 정인홍이 정권을 잡고,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유배시켰다가 처형하였다. 그러나 남이공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의 추천으로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그해 말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이조 참의(參議)⋅예조 참의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어, 홍문관을 실질적으로 오랫동안 관리하다가, 1612년(광해군 4) 홍문관 부제학을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호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의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어, 광해군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에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15년(광해군 7) 대북의 이이첨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시키려고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고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자, 서인의 영수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평산(平山)⋅해주(海州)⋅송화(松禾) 등지에서 몇 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서인 이귀(李貴)와 함께 유배에서 풀려나서, 1621년(광해군 13)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였고, 체찰사(體察使)이경전(李慶全)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전라도와 경상도 양남(兩南) 지방의 군사와 군량미를 점검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 신경준(申景濬)과 최명길(崔鳴吉)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김류(金瑬)⋅이귀(李貴)와 손을 잡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는데, 이때 남이공은 유희분의 일파로 내몰려서 파직당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반정 공신파의 영수 이귀(李貴)의 추천으로 남이공과 김신국(金藎國)은 다시 등용되었다. 처음에 남이공은 가도(椵島: 평안도 선천의 피섬)의 명나라 제독(提督) 모문룡(毛文龍)의 횡포를 무마시키는 문안사(問安使)를 맡았는데, 요동(遼東)이 후금(後金)의 누르하치에게 점령당할 때 모문룡이 명나라 유민(流民)을 이끌고 가도(椵島)에서 자칭 명나라 제독(提督)이라고 일컫고 조선에 막대한 군량미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남이공은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모문룡을 진정시켜 잘 무마하였으므로,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청요직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의 막역한 친구 후추(後瘳) 김신국(金藎國: 1572~1657)도 국가 재정 관리에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인조 때 호조 판서(判書)를 6차례나 역임하며, 두 차례나 호란(胡亂)을 겪고 난 이후에 위기에 빠진 국가 재정을 되살려 냈던 것이다.

1624년(인조 2) 관향사(管餉使)에 임명되어, 군량미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그 뒤에 공서파(功西派)의 영수 김류(金瑬)의 추천으로 함경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가서, 단천(端川)의 은광(銀鑛)에서 은(銀)을 채굴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선 세종 때 명나라로부터 금(金)⋅은(銀)의 세공(歲貢)을 면제 받을 때 우리나라에서 금과 은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단천의 은광을 폐쇄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1627년(인조 5)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가도(椵島)로 가서 제독(提督) 모문룡(毛文龍)을 만나서 그의 무리한 요구를 잘 무마하였다.

1628년(인조 6) 남이공은 백성들에게 포목(布木) 대신에 동전(銅錢)을 사용하도록 용전법(用錢法)을 시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당시 나라에서 동전을 1천 1백여 관(貫)이나 주조(鑄造)하였으나, 백성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할 때 여전히 동전 대신에 포목(布木)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백성들은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1629년(인조 7)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630년(인조 8) 경기 감사(監司)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633년(인조 11) 『광해군실록(光海君實錄)』을 편찬하는 도청(都廳)과 낭청(郎廳)을 관장하였다.

1637년(인조 15) 마침내 도승지(都承知)로 영전되었는데, 광해군 때 도승지를 지냈던 남이공을 인조가 다시 도승지에 임명하여 최측근으로 두고 신임하였던 것은 그만큼 남이공의 인품과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1638년(인조 16) 좌의정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639년(인조 17)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앞서 <병자호란(丙子胡亂)> 직후에 청나라와 화해 조약을 맺을 때 우리나라 왕자와 대신의 자제(子弟)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기로 약속하였는데, 남이공의 주도로 그 왕자와 대신의 자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냈다가, 나중에 그 일이 발각되었다. 이때 청나라의 요구로 인하여 남이공은 관작(官爵)을 빼앗기고 파직되었다.

1640년(인조 18) 7월 18일에 남이공은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76세였다. 문집으로 『설사집(雪蓑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1640년(인조 18) 7월 18일에 남이공(南以恭)이 돌아갔을 때 『인조실록(仁祖實錄)』의 졸기(卒記)를 보면, “남이공은 사람됨이 임기응변에 능하여 권모술수가 많았고, 당파(黨派) 논쟁을 좋아하여, 전후 조정에 벼슬하는 동안에 오직 다른 당파 사람과 알력만을 일삼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권신 최명길(崔鳴吉)에게 아부하여 이조 판서가 되어서, 급급하게 자기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려고 모의하였으므로, 인조가 좋지 않게 여기자, 남이공이 스스로 사직하기를 청하여 체직되었다. 그 뒤에 대신(大臣)의 자제를 청(淸)나라에 인질로 보낼 때 거짓으로 인질을 보냈다가 발각되어 파직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인조가 그의 관작(官爵)을 회복해 주도록 명하였다.” 하였다.[『인조실록』 18년 7월 18일 1번째기사] 서인의 사관(史官)들이 북인의 소북 영수인 남이공을 좋게 평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졸기를 보면, 남이공은 임기응변에 능하여 위기를 돌파할 능력을 갖춘 인물이며, 여러 당파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당파를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였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이공은 친구 김신국과 함께 유교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남이공은 1590년(선조 23) 나이가 26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절친한 친구 김신국과 함께 나라를 경영할 큰 포부를 가지고, 서인과 동인의 중진들을 서슴없이 공격하였다. 1591년(선조 24) 좌의정정철(鄭澈)이 선조에게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가,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누어졌는데, 영의정이산해를 중심으로 강경론을 펴던 동인은 북인이 되었고, 우의정유성룡(柳成龍)을 영수로 온건론을 펴던 동인은 남인이 되었다. 그에 앞서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반역 사건을 다스리는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철이 위관(委官: 재판장)이 되어 동인의 강경파 이발(李潑)⋅정여립(鄭汝立)⋅최영경(崔永慶) 등 1천여 명을 죽였는데,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은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며 정철을 공격하였다. 이에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질 때 남이공은 정여립⋅이이첨 등과 함께 온건파 유성룡을 공격하고 강경파 이산해를 적 지지하여, 마침내 김신국과 함께 북인의 소장파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남이공이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을 때, 이산해가 평판이 좋지 않는 홍여순(洪汝諄)을 대사헌에 임용하려고 하자, 남이공은 시강원 보덕(輔德)김신국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홍여순이 대사헌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산해⋅홍여순은 정인홍⋅이이첨과 함께 남이공⋅김신국을 배척하고 대북(大北)이 되었고, 남이공⋅김신국은 이이첨의 파직을 청하며 유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소북(小北)이 되었다. 이에 선조가 말하기를, “남이공이 나라에 무슨 공덕이 있다고, 보잘것없는 일개 낭관으로서 어찌하여 이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인가.” 하였다.[『선조실록』 32년 11월 21일 1번째기사] 선조 말년에 선조가 젊은 인목왕후(仁穆王后)를 맞아들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폐위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소북의 영수 유영경은 선조의 뜻을 받들어 정권을 잡았으나, 대북의 정인홍⋅이이첨 등은 이에 반대하고 광해군을 지지하다가 실각하였다. 이때 김신국은 영의정유영경을 지지하였으나, 남이공은 이에 반대하여 유영경을 공격하다가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에 소북은 유영경을 영수로 하는 탁소북(濁小北)과 남이공을 영수로 하는 청소북(淸小北)으로 나누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의 정인홍⋅이이첨이 정권을 잡고,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유배시켰다가 처형하였으나, 남이공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의 추천으로 마침내 도승지(都承知)⋅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서인이 정권을 잡자, 대북의 정인홍⋅이이첨 등은 모두 처형되었으나, 소북의 남이공과 김신국은 반정 공신 이귀(李貴)⋅김류(金瑬)⋅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남이공은 도승지⋅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김신국은 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남이공은 광해군과 인조 때 도승지를 각각 지내며 두 임금의 측근으로 활동하였으며, 김신국은 인조 때 6차례 호조 판서를 지내며 나라의 경제를 구원하였다. 남이공은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동전(銅錢)을 시행하기 위하여 용전법(用錢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고, 단천(端川)의 은광에서 다시 은(銀)을 채굴할 것을 주장하였다. 남이공이 북인의 소장파로서 소북의 영수가 되어, 국가를 위하여 적폐(積弊)를 개혁할 때 형 남이신(南以信)과 8촌 동생 남이웅(南以雄)은 남이공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나 삼촌 남근(南瑾)은 대북의 이이첨 일파가 되어,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출하는 데에 앞장섰는데, 그때 인목대비의 폐출을 반대하던 남이공과 서로 원수와 같이 대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 삼촌 남근은 유배되어 죽었으나, 남이공은 다시 기용되어, 개혁 정치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후손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유몽필(柳夢弼)의 딸이다.[<방목>] 아들 남두북(南斗北)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평현감(富平縣監)을 지냈고, 의풍군(宜豊君)에 봉해졌다. 딸은 강원도 관찰사이원진(李元鎭)의 아내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가주집(家州集)』
  • 『갈암집(葛庵集)』
  • 『강한집(江漢集)』
  • 『검재집(儉齋集)』
  • 『경정집(敬亭集)』
  • 『계곡집(谿谷集)』
  • 『계당집(溪堂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고담일고(孤潭逸稿)』
  • 『고대일록(孤臺日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구봉집(九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언(記言)』
  • 『기축록(己丑錄)』
  • 『낙전당집(樂全堂集)』
  • 『낙촌집(洛村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남계집(南溪集)』
  • 『내암집(來庵集)』
  • 『노봉집(老峯集)』
  • 『다산집(茶山集)』
  • 『당촌집(塘村集)』
  • 『대산집(臺山集)』 『동강유집(東江遺集)』
  • 『동계집(東溪集)』
  • 『동명집(東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면암집(勉菴集)』
  • 『명곡집(明谷集)』 『명재유고(明齋遺稿)』 『몽예집(夢囈集)』
  • 『묵수당집(嘿守堂集)』
  • 『묵재일기(黙齋日記)』
  • 『문곡집(文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헌집(白軒集)』 『백호전서(白湖全書)』
  • 『번암집(樊巖集)』 『북저집(北渚集)』
  • 『사서집(沙西集)』
  • 『삼연집(三淵集)』
  • 『상촌고(象村稿)』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서담집(西潭集)』
  • 『서애집(西厓集)』
  • 『석담집(石潭集)』
  • 『석루유고(石樓遺稿)』
  • 『설사집(雪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릉집(少陵集)』
  • 『속잡록(續雜錄)』
  • 『송강집(松江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송죽당집(松竹堂集)』
  • 『수색집(水色集)』
  • 『순암집(順菴集)』 『아계유고(鵝溪遺稿)』
  • 『야당유고(野堂遺稿)』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리집(梧里集)』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오탄집(梧灘集)』
  • 『외재집(畏齋集)』 『용계유고(龍溪遺稿)』
  • 『용담집(龍潭集)』 『용주유고(龍洲遺稿)』
  • 『우득록(愚得錄)』
  • 『우복집(愚伏集)』
  • 『월봉집(月峯集)』
  • 『월사집(月沙集)』 『은봉전서(隱峯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인재집(訒齋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잠곡유고(潛谷遺稿)』
  • 『정무록(丁戊錄)』
  • 『제호집(霽湖集)』
  • 『죽창집(竹窓集)』
  • 『죽창한화(竹窓閑話)』
  • 『지봉집(芝峯集)』
  • 『지천집(遲川集)』
  • 『지호집(芝湖集)』
  • 『창석집(蒼石集)』
  • 『창주유고(滄洲遺稿)』 『창하집(蒼霞集)』
  • 『청백일기(靑白日記)』
  • 『청봉집(晴峯集)』
  • 『청성잡기(靑城雜記)』 『청음집(淸陰集)』 『촌은집(村隱集)』
  • 『추산집(秋山集)』
  • 『태천집(苔泉集)』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풍서집(豐墅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하음집(河陰集)』
  • 『학주전집(鶴洲全集)』
  • 『해사록(海槎錄)』
  • 『현주집(玄洲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후계집(後溪集)』
  • 『후광세첩(厚光世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