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량(南泰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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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95년(숙종 21)∼1752년(영조 28) = 58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이조 참판(參判)이다. 자(字)는 유능(幼能)이고, 호(號)는 광릉거사(廣陵居士), 증직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양부는 남제명(南悌明)이고, 생부는 진사(進士)남효명(南孝明)이다. 양모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청천군(淸川君) 이렴(李濂)의 딸이고, 생모 유씨(柳氏)는 감사(監司)유이복(柳以復)의 딸이다. 승지(承旨)남지훈(南至熏)의 손자이고, 도승지(都承知)남태온(南泰溫)의 동생이다.

숙종 시대 활동

1717년(숙종 43)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사마방목>]

영조 시대 활동

1727년(영조 3)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문과방목>]

1729년(영조 5)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730년(영조 6)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745년(영조 21)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749년(영조 25)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가,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

1752년(영조 28) 3월에 돌아갔는데, 향년이 58세였다.

저서로는 『대동휘찬(大東彙纂)』이 남아 있다.

후손

부인 이씨(李氏)는 이의만(李宜晩)의 딸이다.[<방목>] 아들은 남문로(南文老)이다. 손자 남이도(南履道)는 도사(都事)를 지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강한집(江漢集)』
  • 『겸재집(謙齋集)』
  •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
  • 『경현재집(警弦齋集)』
  • 『국포집(菊圃集)』 『귀록집(歸鹿集)』
  • 『모헌집(慕軒集)』
  • 『사변일기(事變日記)』
  • 『삼산집(三山集)』
  • 『소곡유고(素谷遺稿)』
  • 『약산만고(藥山漫稿)』 『오천집(梧川集)』 『자저(自著)』 『창하집(蒼霞集)』
  • 『청벽집(靑壁集)』 『퇴헌유고(退軒遺稿)』
  • 『풍서집(豐墅集)』
  • 『학당유고(鶴塘遺稿)』 『학당전고(鶴塘銓攷)』 『홍재전서(弘齋全書)』 『황고집(黃臯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