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만중(睦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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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27년(영조 3)∼1810년(순조 10) = 84세.] 조선 후기 영조~순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대사간(大司諫)⋅병조 참지(參知)⋅중추부 지사(知事)이다. 자(字)는 유선(幼選)이고, 호(號)는 여와(餘窩)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목조우(睦祖禹)이고,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명익(韓命翼)의 딸이다. 홍문관 수찬(修撰)목취선(睦取善)의 6대손이고, 승지목천성(睦天成)의 현손자이다. 남인(南人)의 벽파(僻派)로서 남인의 시파(時派)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데에 앞장섰던 공서파(功西派)의 우두머리이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등과 함께 18세기 조선 후기 문학을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47년(영조 23)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상을 연달아 당하여 5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759년(영조 35)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문과방목>]

1760년(영조 36)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의정부 사록(司錄)이 되었다.

1762년(영조 38) 승정원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佐郎)이 되었으나, 왕명을 어겨서 함경도 이성(利城)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우거(寓居)하였다.

1764년(영조 40) 다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765년(영조 41) 예조 좌랑이 되었다가, 예조 정랑(正郎)으로 승진하였고,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뒤이어 외직으로 나가서 충청도 비인현감(庇仁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노론 출신 충청도 감사홍낙순(洪樂純)과 불화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우거하였다. 당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을 둘러싸고 시파와 벽파가 대립하였는데, 벽파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정당하다고 보았으나,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였다. 벽파는 노론이 대다수였고, 시파는 남인과 소론이 많았으나, 목만중과 홍의운(洪義運)⋅이기경(李基慶) 등은 남인의 벽파로서 노론의 벽파와 손을 잡고, 남인의 시파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영조가 말년에 후계자가 없자,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王世孫: 정조)으로 봉하고, 시파를 등용하기 시작하자, 벽파는 점차 위축되었다. 이에 목만중은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명산을 유람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이때 장남 목인노(睦仁老) 내외가 잇달아 죽자, 세상에 나아갈 의욕을 잃어버렸다.

1772년(영조 48) 문우(文友)들과 함께 강원도 등지를 유람하고 금강산을 구경하며, 많은 시(詩)를 지었다.

1773년(영조 49) 문우(文友) 번암 채제공⋅해좌 정범조 등과 함께 시를 짓는 시사(詩社) 모임을 결성하고, 새로운 시작(詩作)을 시도하며,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1775년(영조 51) 문우(文友)들과 함께 평안도 지방을 유람하며 기행문을 짓고 많은 시부(詩賦)를 지었다. 이 시기에 목만중이 지은 기행문과 시(詩)들이 그의 문집 『여와집(餘窩集)』에 실려 있다.

정조 시대 활동

1779년(정조 3) 상의원 별제(別提), 황해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목만중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는 탕평책(蕩平策)으로 남인의 벽파 목만중을 임용하려고 하였으나, 목만중은 벼슬에 나아갈 생각이 없어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1786년(정조 10) 정조가 문신들에게 시행한 중시(重試)에서 갑과(甲科) 1등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60세였다.[<문과방목>] 정조는 당대의 문학을 진작시키려고 문장가 목만중을 돈녕부 도정(都正)에 임명하였다. 목만중은 오랫동안 관직을 떠났다가, 환갑이 넘어서 관직에 복귀하였다.

1787년(정조 11)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평안도 태천현감(泰川縣監)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현감의 임기가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1790년(정조 14) 평안도 지방에 암행어사로 나갔던 이면응(李冕膺)이 돌아와서 목만중을 고발하였는데, 태천현감 시절에 목만중이 불법을 자행하였다고 무고하였던 것이다. 이에 목만중은 시파의 무고를 당하여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충청도 면천(沔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석방되었다.

1791년(정조 15) 차남 목인규(睦仁圭)가 상소하여 남인의 시파들이 믿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고 비판하다가, 남인 시파의 미움을 받아서 유배당하였다.

1792년(정조 16) 여름에 차남 목인규가 석방되었다.

1793년(정조 17) 정조가 탕평책을 취하여 벽파를 등용하고, 시파를 축출하였다. 이에 노론의 벽파 영수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하고, 소론의 벽파 영수 목만중을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하였다.

1794년(정조 18) 중추부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1796년(정조 20) 공조 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병조 참의가 되었다.

1797년(정조 21) 나이 71세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1798년(정조 22)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그해 말에 돈녕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1799년(정조 23)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800년(정조 24) 다시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는데, 그해 5월에 정조가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내려서, 앞으로 남인의 시파와 소론의 시파를 대거 등용하겠다고 밝혔다. 그 뒤에 20일이 지나서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자, 당시 좌의정심환지 등 노론의 벽파가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정조의 독살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순조 시대 활동

1801년(순조 1) 나이 16세의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대비(貞純大妃: 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하였다. 노론의 벽파 심환지가 원상(院相)이 되어 정권을 잡고, 소론의 벽파 우두머리 목만중을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였다. 그때 목만중은 나이가 75세였다.

1801년(순조 1) 충청도 진산(珍山)에서 천주교도 윤지충(尹持忠) 등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불태워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대사간목만중은 윤지충 등을 탄핵하며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라고 몰아붙였다.이때 대사간목만중은 영의정심환지와 함께 남인의 시파가 주로 믿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라고 비판하고,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서, 천주교도를 박해하였는데, 남인의 시파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 정약용의 형)⋅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 등 140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전국적으로 300여 명의 천주교도가 순교하였다. 이때 목만중과 홍의운(洪義運)⋅이기경(李基慶) 세 사람은 생살권(生殺權)을 가지고 수많은 천주교도를 찾아내어 마치 풀을 베듯이 잡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고 한다.[『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17] 실록에서는 이것을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부른다.

1803년(순조 3) 돈녕부 동지사가 되었다가, 1805년(순조 5)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806년(순조 6) 나이 80세 때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품(陞品)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였다. 그해 8월에 부인 이씨(李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1807년(순조 7)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고, 중추부 지사(知事)가 되어, 나이 8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해 3월에 둘째아들 목인규가 병으로 죽었다.

1808년(순조 8)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고 사양하자, 다시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1809년(순조 9) 손자 목태석(睦台錫)이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1810년(순조 10) 몸이 편찮아서 9월 14일에 노병으로 서부 반송방(盤松坊) 근동(芹洞)의 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84세였다.

문집으로는 『여와집(餘窩集)』이 남아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통진 고판산(高阪山) 서쪽 덕포(德浦)에 있는데, 삼명(三溟) 강준흠(姜浚欽)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고, 또 손자 목태석(睦台錫)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여와집(餘窩集)』 권23, 부록]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한덕(李漢德)의 딸인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목인노(睦仁老)이고, 차남 목인규(睦仁圭)는 진사(進士)이고, 딸은 사헌부 지평(持平)홍의현(洪羲玄)의 처가 되었다. 손자 목태석(睦台錫: 목인규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다. 측실에서 딸을 두었는데, 서녀(庶女)는 안효신(安孝臣)의 처가 되었다.[신도비명]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일성록(日省錄)[정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옹집(艮翁集)』
  • 『관란유고(觀瀾遺稿)』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둔봉집(遯峯集)』
  • 『무명자집(無名子集)』
  • 『번암집(樊巖集)』
  • 『삼명시집(三溟詩集)』
  • 『석북집(石北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어계집(漁溪集)』
  • 『여와집(餘窩集)』
  • 『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석(燕石)』
  • 『오한집(聱漢集)』
  • 『죽헌집(竹軒集)』
  • 『태을암집(太乙菴集)』
  • 『추담집(秋潭集)』
  • 『태을암집(太乙菴集)』
  • 『표암고(豹菴稿)』
  • 『해좌집(海左集)』
  • 『활산집(活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