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구(郭聖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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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6년(선조 39)∼1668년(현종 9) = 63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원 헌납(獻納)이다. 자(字)는 문징(文徵)이고, 호(號)는 현주(玄洲)이다. 본관은 해미(海美)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강진(康津)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곽치요(郭致堯)이고, 예조 좌랑(禮曹左郞)곽기수(郭期壽)의 손자이다. 효종과 현종 때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으로 활동하며, 정론(正論)을 펴기에 힘썼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9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631년(인조 9)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주의 감귤을 나누어 주고 글을 짓게 하는 황감시(黃柑試)에서 2등을 차지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는 특혜를 받았다.[『인조실록』 9년 1월 10일 1번째기사] 그해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문과방목>] 그해 말에는 30세 이하의 전경 문신(專經文臣: 오로지 유교의 경전만을 읽고 연구하는 문신)으로 정태화(鄭太和)⋅윤집(尹集: 3학사 중의 하나)⋅남노성(南老星) 등과 함께 뽑혔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9년 12월 26일]

1639년(인조 17) 성균관학록(學錄)이 되었다가, 성균관 학정(學正)을 거쳐, 성균관 박사(博士)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1640년(인조 18) 예조 좌랑(左郞)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左郞)으로 옮겼으며,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그때 정언곽성구가 부모의 병을 구완하기 위하여 체직(遞職)을 원하는 상소를 올리자, 인조가 말미를 주어 강진(康津)에 가서 근친(覲親)하는 것을 허락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8년 7월 15일] 그 뒤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8년 11월 13일 3번째기사]

1641년(인조 19) 성절사(聖節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정사(正使)원두표(元斗杓), 부사(副使)이경엄(李景嚴)과 함께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왔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9년 11월 26일]

1642년(인조 20)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부모의 병을 구완하기 위하여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인조가 관직을 체차(遞差)하도록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20년 7월 11일] 이에 곽성구는 고향 강진으로 돌아가서 2년 동안 늙은 부모를 모셨다.

1644년(인조 22)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충청도결성현감(結城縣監)이 되었다. 현감곽성구는 결국 충청도 결성에서 전라도 강진을 오가며 부모를 봉양하고 병을 구완하였다.

1646년(인조 24)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정언곽성구가 부모의 병을 구완하려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전라도 강진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24년 12월 30일]

1647년(인조 25)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어, 서연(書筵)에서 세자(世子: 소현 세자)를 가르쳤다. 그해 가을에 필선곽성구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인조가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고향에 다녀오라.” 하였으므로,[『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25년 7월 11일] 필선곽성구는 부모를 봉양하려고 말미를 받아서 고향 강진을 다녀왔다.

1648년(인조 26)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나, 부모의 병을 구완하려고 외직을 자원하여 전라도무안현감(務安縣監)으로 나갔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26년 8월 19일]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어, 서연(書筵)에서 세자(世子: 현종)를 가르쳤다. 그해 다시 사헌부 4품의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는데, 효종의 <북벌(北伐) 사업>을 추진하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도와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맏아들 곽제화가 과거에 급제하고 대간에 들어와 송시열⋅송준길을 적극 지지하다가 당파 싸움에 휘말리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곽성구는 당파 싸움에 적극 개입하지 않고 초연하였기 때문에 비록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는 않았으나, 관직이 4, 5품에 머물면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지 못하였다.

1655년(효종 6)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56년(효종 7)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효종실록』 7년 2월 4일 1번째기사] 아버지 곽성구와 아들 곽제화가 함께 대간에서 정론(正論)을 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63년(현종 4)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64년(현종 5)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맏아들 곽제화가 현종에게 대간의 바른 말을 듣지 않는다고 직언(直言)을 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 경성(鏡城)판관(判官)으로 좌천되었다. 반대파에서 아들 곽제화가 월과(月課) 제술(製述)을 3차례나 짓지 않았다고 무함하면서, 본읍(本邑)에 충군(充軍)되었다.

1665년(현종 6)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효종실록』 6년 8월 30일] 그는 아들 곽제화를 구원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사(合辭)하여 곽제화를 구원하려고 현종에게 간청하였으며, 영의정정태화(鄭太和)도 좌의정⋅우의정과 함께 현종에게 건의하면서 마침내 아들 곽제화가 풀려났다. 곽성구는 아들 곽제화에게 고향 강진으로 돌아가서 은거하도록 하였는데, 그 사이에 곽성구는 노심초사하다가 병을 얻게 되었다.

1667년(현종 8)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1668년(현종 9)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3세였다. 고향 전라도 강진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문집으로 『현주세고(玄洲世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도 고향 강진에 있는 늙은 부모를 봉양하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직을 사임하거나 외직을 자청하였다. 또 조부 곽기수(郭期壽)처럼 당쟁(黨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강진 해미(海美)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1640년(인조 18) 5월, 곽성구는 신병 때문에 사간원 정언(正言)의 자리를 체차(遞差)해 줄 것을 인조에게 간청하기를, “신은 용렬한 자질을 가진 신진(新進)으로서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를 외람되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노둔한 자질을 채찍질하려는 것이 신의 구구한 정성이니, 지금 정고(呈告: 휴직을 청함)하여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신이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아닙니다. 갑자기 질병이 다시 발병한 상태에서 여러 날 부지런히 직책을 수행하는 과정에 통증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신이 앓고 있는 증상이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감히 성상께 굳이 번거롭게 아뢸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천지 같고 부모 같으신 성상께서 신의 매우 간절한 심정을 살피시어 신의 본직을 체차하여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승정원에서 계자인(啓字印)을 찍어서 내려보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8년 5월 22일] 하지만 젊은 곽성구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강진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7월에 사간원 정언곽성구가 강진에 있는 병든 부모를 뵈러 가는 일로 정사(呈辭: 정고)를 올렸는데, 승정원에서 입계(入啓)하니, 인조가 곽성구에게 말미를 주어 고향에 다녀오도록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8년 7월 15일]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간 곽성구가 늙은 부모의 병환을 구완하다가 휴가의 기간을 넘겨서, 맡은 일을 제때에 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인혐(引嫌)하였다. 이때 대간(臺諫)의 동료들은 그를 탄핵하지 않고 오히려 변명하여 주었는데, 그해 12월에 사헌부에서는 “사헌부 지평(持平)곽성구가 스스로 인혐하고 벼슬에서 물러가려고 합니다. 먼 길에 고질병이 심해져서 다소 지연되었으니, 이는 형편상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찌 피혐할 것이 있겠습니까. 별달리 피혐할 만한 일이 없으니, 지평곽성구를 다시 출사(出仕)하도록 하소서.”하고 아뢰니, 인조가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1641년(인조 19) 9월, 성절사(聖節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는데, 고향 강진에 부모를 뵈러 갔다가, 늦게 돌아와서 맡은 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서장관(書狀官)곽성구는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방물(方物: 진상하는 우리나라 특산물)을 봉과(封裹)하는 데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잘못이 너무 심하여 할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배표(拜表: 표문을 절하고 보내는 것)하는 날이 내일 아침으로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들어온다는 기별이 없습니다. 비록 질병이나 사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막중한 일을 어찌 감히 이렇게까지 태만하고 소홀히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곽성구를 잡아다가 추국(推鞫)하고 서장관을 즉시 개차 하소서” 하고 아뢰었으나, 인조는 그를 용서하고 그대로 서장관으로 떠나도록 명하였다. 이후 예정한 날짜대로 그해 9월 21일에 성절사 겸 사은사의 동지사 서장관(書狀官)곽성구는 정사원두표(元斗杓), 부사이경엄(李景嚴)과 함께 인조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사신 일행을 이끌고 청나라로 먼 길을 떠났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9년 9월 21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대월리의 선영(先塋)에 있다.

장남 곽제화(郭齊華)는 사간원 사간(司諫)을 지냈고, 차남 곽제항(郭齊恒)은 진사(進士)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기언(記言)』
  • 『면우집(俛宇集)』
  • 『소은유고(素隱遺稿)』
  • 『송사집(松沙集)』
  • 『염헌집(恬軒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이재유고(頤齋遺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