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명(具允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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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11년(숙종 37)∼1797년(정조 21) = 87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 예조 판서(判書)이고, 봉작(封爵)은 능은군(綾恩君)이다. 자(字)는 사정(士貞)이고, 호는 겸산(兼山)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구몽규(具夢奎)이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윤천준(尹天駿)의 딸이다. 생부는 한성부 판윤(判尹)구택규(具宅奎)이고, 생모 홍씨(洪氏)는 사옹원 첨정(僉正)홍우채(洪禹采)의 딸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33년(영조 9)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사마방목>]

1743년(영조 19) 정시(庭試) 문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문과방목>]

1745년(영조 21)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1747년(영조 23)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749년(영조 25)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해에 특별히 승정원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이후 약 14년 동안 주로 승지로 재임하면서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1757년(영조 33) 채제공(蔡濟恭)·조명정(趙明鼎)과 함께 어제 편차인(御製編次人)에 뽑혔는데, 이듬해 『열성지장(列聖誌狀)』과 『어제 보편(御製補編)』을 편집하여 발간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으로부터 황경원(黃景源)·정실(鄭宲)·윤광소(尹光紹)와 함께 문장가로서의 자질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1763년(영조 39) 공조 판서와 예조판서, 그리고 호조 판서를 두루 거친 후, 1764년(영조 40)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면직되었다.

1768년(영조 42)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정조 시대 활동

1776년(정조 즉위)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의 봉사손(奉祀孫)으로 능은군(綾恩君)을 습봉(襲封)하였다.

1780년(정조 4) 의금부 판사(判事)와 공조 판서에 이어 형조 판서를 역임하고, 1786년(정조 10) 또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796년(정조 20)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는데, 이듬해 3월 27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791년(정조 15) 정조의 명을 받아 『무원록(無寃錄)』을 언해하였다. 많은 서적들을 편집, 교정하였는데, 『후기촬록(喉記撮錄)』·『전율통보(典律通補)』·『육상궁소녕원식례(毓祥宮昭寧園式例)』·『증수무원록대전(增修無寃錄大全)』·『증수무원록언해』·『어제고금연대구감(御製古今年代龜鑑)』·『영종어제속편(英宗御製續編)』 등이 전한다.

묘소와 후손

부인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최상리(崔尙履)의 딸인데,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장남은 병조 판서(判書)를 지낸 구상(具庠)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가암유고(可庵遺稿)』
  • 『강재집(剛齋集)』
  • 『관암전서(冠巖全書)』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극원유고(屐園遺稿)』
  •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서당사재(西堂私載)』
  • 『소곡유고(素谷遺稿)』
  • 『심리록(審理錄)』
  • 『오천집(梧川集)』
  • 『은대조례(銀臺條例)』
  • 『이계집(耳溪集)』
  •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저촌유고(樗村遺稿)』
  • 『좌소산인집(左蘇山人集)』
  • 『풍서집(豐墅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