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치훈(南致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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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5년(인조 23)∼1716(숙종 42) = 72세.]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형조 참판(參判)⋅강원도 감사(監司)이다. 자(字)는 훈연(熏然)이고, 호(號)는 지산(芝山)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경상도 감사남훤(南翧)이고,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여주목사(驪州牧使)권현(權晛)의 딸이다. 병조 참판(參判)남이신(南以信)의 증손자이고, 예문관 제학(提學)남익훈(南益熏)의 조카이고, 호조 참판남태경(南泰慶)과 이조 판서남태제(南泰齊)의 조부이다. 정파는 북인(北人)의 소북파(小北派)에 속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사마방목>]

1678년(숙종 4)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문과방목>]

1679년(숙종 5)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1681년(숙종 7) 장차 홍문관에 들어올 인재를 미리 뽑는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을 추방하였는데, 북인(北人) 남치훈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는 데에 협력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소론(少論)이 정권을 잡고 남인(南人)을 모조리 축출하였는데, 남치훈은 북인(北人)의 소북(小北)으로 간신히 벼슬을 유지하였다.

1698년(숙종 24) 숙종의 신임을 얻어서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707년(숙종 33)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고,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712년(숙종 38)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1713년(숙종 39)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716년(숙종 42)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72세였다.

후손

부인 신씨(申氏)는 호군(護軍)신휘(申暉)의 딸인데,[『죽당집(竹堂集)』 권14] 장남 남보명(南輔明)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고, 차남은 남우명(南遇明)이고, 삼남 진사(進士)남필명(南弼明)은 도정(都正)을 지냈다. 손자 남태경(南泰慶)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參判)를 지냈고, 손자 남태제(南泰齊)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判書)를 지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계집(東溪集)』
  • 『동사일기(東槎日記)』
  • 『만정당집(晩靜堂集)』
  • 『북헌집(北軒集)』
  • 『서파집(西坡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재집(疎齋集)』
  • 『역옹유고(櫟翁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옥오재집(玉吾齋集)』
  • 『외암유고(巍巖遺稿)』
  • 『우사집(雩沙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정재집(定齋集)』 『제월당집(霽月堂集)』
  • 『종묘의궤(宗廟儀軌)』
  • 『죽당집(竹堂集)』
  • 『죽천집(竹泉集)』
  • 『청선고(淸選考)』
  • 『한포재집(寒圃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