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명(南九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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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1년(현종 2)∼1717년(숙종 45) = 57세.]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순천부사(順天府使)⋅제주도 통판(通判)이다. 자(字)는 기서(箕瑞)이고, 호(號)는 우암((寓庵)인데, 어릴 때 아명(兒名)은 교연(矯然)이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경상도 영해(寧海) 원구리(元丘里) 출신으로 거주지는 경상도 경주(慶州) 영호(影湖)이다. 아버지는 종사랑(從仕朗)남상주(南尙周)이고, 어머니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진사(進士)조정연(趙廷珩)의 딸이다. 이형상(李衡祥)⋅이익한(李翊漢)⋅조덕린(趙德鄰)⋅권이진(權以鎭)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의병장(義兵將)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의 증손자이고, 병조 좌랑(左郞)남노명(南老明)의 막내동생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87년(숙종 13)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네 형들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 상례를 끝마친 다음에 처가가 있는 경주(慶州)로 이사하여 영호(影湖)의 서쪽 변두리에 거주하였다.

1693년(숙종 19)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성균관 권지(權知: 임시) 학유(學諭)에 보임되었으나. 그때 인현왕후(仁顯王后)와 장희빈(張禧嬪) 때문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쟁이 치열하였으므로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서, 벼슬을 사양하고 경주 영호(影湖)로 돌아와서 10년 동안 은거하였다.

1705년(숙종 31) 부인상을 당하고, 생활이 궁핍해지자, 맏형 남노명(南老明)의 강력한 권유로 인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1707년(숙종 33) 성균관 학정(學正)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보안찰방(保安察訪)이 되었다. 그 뒤에 4년 동안에 번수찰방과 창락찰방 등을 역임하였다.

1711년(숙종 37) 과천현감(果川縣監)에 임명되었는데, 남구명이 현감에 부임하려고 관복을 입고 의정부에 가서 영의정서종태(徐宗泰)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자, 서종태는 남구명에게 운이 좋아서 갑자기 출세하였다고 농담을 하자, 벼슬에 부임하기를 거절하고 경주로 돌아왔다.[행장] 경주의 영호(影湖) 서쪽에 서실(書室)을 짓고 ‘우암(寓庵)’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자기의 호(號)로 삼았다. 이곳에서 책을 읽고 시(詩)를 지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712년(숙종 38) 제주도 통판(通判)에 임명되어, 제주도로 건너갔다.

1713년(숙종 39) 한라산을 등정하고 장편시 「장유(壯遊)」를 지었고, 또 제주도 여러 고을의 민정(民情)을 돌아보기 위해 대정현(大靜縣)에서 정의현(旌義縣)까지 일주하며, 「속장유(續壯遊)」를 지었다. 그때 제주도에 기근(饑饉)이 크게 들었는데, 통판남구명이 제주도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여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715년(숙종 41) 조정으로 돌아와서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1716년(숙종 42) 사과(司果)가 되었다. 그해 5월에 전라도순천부사(順天府使)가 임명되어 부임하였는데, 그해 10월에 부사남구명은 5개월 만에 파직되었고, 그해 12월에 남구명은 직첩(職牒)마저 환수 당하였다. 남구명이 제주도 통판으로 있었을 때 기민(饑民)을 구휼한 실상을 상세히 조사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파견되었던 감진어사(監賑御使)황구하(黃龜河)가 제주도에 비축한 진휼 곡식 이외에 60석을 더 전용하였다고 하여, 당시 제주목사와 통판과 수령들을 고발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남구명은 경주로 돌아와서, 경주 영호(影湖) 서쪽에 있는 ‘우암(寓庵)’에서 책을 읽고 시(詩)를 지어며 지냈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하다가, 남구명은 병을 얻어서, 1719년(숙종 45) 10월 25일에 경주의 영호의 우암(寓庵)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7세였다.

1720년(숙종 46) 균전사(均田使)김재로(金在魯)가 전라도 지방을 순찰하다가 순천(順天)에 이르렀는데, 순천 고을 사람들이 전 순천 부사남구명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다시 순천 부사로 복직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재상 김재로가 글을 비변사(備邊司)에 보내 제주도 진휼 상황을 다시 조사하게 하면서, 마침내 곡물 60석을 도용하였다는 남구명의 누명을 벗겨 주었다.[행장] 이조에서 남구명을 순천부사로 복직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미 남구명은 죽은 뒤였다. 이에 순천 고을 사람들이 슬퍼하며, 남구명을 기리기 위해서 청동(靑銅)으로 만든 ‘영세(永世)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다.

문집으로 『우암집(寓庵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淸廉)하고 결백(潔白)하여, 부정(不正)을 용납하지 못하였다.

남구명(南九明)은 1661년(현종 2) 3월에 경상도 영해 원구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종사랑(從仕朗)남상주(南尙周)와 어머니 한양조씨(漢陽趙氏) 사이에 태어난 5남 2녀 중의 막내아들이었다. 임신하였을 때 아버지가 용(龍) 꿈을 꾸었기 때문에 아명(兒名)을 도지개 같다는 뜻으로 ‘교연(矯然)’이라고 불렀다. 모습이 특이하고 아주 총명하였는데 하루에 수많은 글자를 외워서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행장]

나이 9세 때에 어머니 조씨(趙氏)가 돌아가면서 형제자매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 남상주는 어머니 상례를 끝마친 후, 전 가족을 이끌고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대둔산(大芚山) 아래 한계(閑溪)로 이사하여 야산(野山)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때 남구명은 아버지 남상주와 맏형 남노명(南老明)에게 글을 배웠다. 생활이 조금 안정 되자, 남노명은 경주에 사는 월성이씨(月城李氏)와 혼인하였다. 남노명은 과거에 급제한 뒤, 처음에 여러 우역(郵驛)의 찰방(察訪), 즉 우승(郵丞)을 전전하다가, 병조 좌랑(兵曹左郞)⋅부사(府使)까지 역임하고, 나이가 많아서 벼슬에서 물러나서 낙향(落鄕)하였다. 남구명은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에 맏형 남노명을 아버지처럼 섬기고 그 말씀에 따랐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선정(善政)하는 수령의 재임용하는 문제를 논하기를, “수령(守令)이 체임(遞任)될 때 고을 사람들이 다시 유임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이 모두 진실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없다. 혹은 사정에 끌려서 호소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권력의 협박으로 호소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믿을 수 없는 점이 오히려 많다. 근래 남구명(南九命)이란 분은 영남 사람이지만, 전라도순천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조정에서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였다. 그 뒤에 어사(御史)황구하가 그 고을에 들려서 마음대로 고을 아전들을 부려먹으려고 하므로 순천부사가 이에 불응하자, 어사가 크게 노하여 그를 무고하여 관직을 빼앗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 뒤에 균전사김재로가 순천에 왔다가, 온 고을 사람들이 남구명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다시 복직시켜 달라고 애원하여, 마침내 이조에 글을 보내어 복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어사는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었고, 남구명은 추후하여 포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삭탈된 관직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처가 없었으니,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일반 관료들에게 책임을 묻고 독려할 방도가 있겠는가.” 하였다.[『성호사설(星湖僿說)』 권15]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경주(慶州) 동면(東面) 윤화평(輪火坪)의 동별산(東鼈山)에 있는데,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또친구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무덤 앞에 묻었다. 또 손자 남용만(南龍萬)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우암집(寓庵集)』 권5 부록] 1860년(철종 11) 남구명의 5대손 남유구(南有龜)가 그의 문집 『우암집(寓庵集)』을 편찬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부인 월성이씨(月城李氏)는 무과(武科) 이진(李璡)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남국형(南國衡)이고, 차남은 남국화(南國華)이며, 장녀는 이인재(李仁載)의 처이고, 차녀는 임일현(任一鉉)의 처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구봉집(九峯集)』
  • 『금강집(錦江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시암집(是庵集)』
  • 『옥천집(玉川集)』
  • 『우암집(寓庵集)』
  • 『유회당집(有懷堂集)』
  • 『정재집(定齋集)』
  • 『정헌집(定軒集)』
  • 『지족당집(知足堂集)』
  • 『청천집(靑泉集)』
  • 『치암집(癡庵集)』
  • 『한국계항보(韓國系行譜)』
  • 『활산집(活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