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언경(南彦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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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8년(중종 23)∼1594년(선조27) = 67세.] 조선 전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참의(參議)⋅전주부윤(全州府尹)이다. 자(字)는 시보(時甫)이고, 호(號)는 정재(靜齋)⋅동강(東岡)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인데, 만년에 경기 양근(楊根) 영천(靈泉)에 옮겨가서 살았다.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簽知事)남치욱(南致勗)이고,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첨정(僉正)유한평(柳漢平)의 딸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고,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와 절친한 사이였다. 조선시대 최초의 양명학자라고 일컬어지는데, 그의 문하에서 양명학파 정제두(鄭齊斗)⋅이요(李瑤) 등이 배출되었다.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영의정남재(南在)의 6대손이고, 좌의정남재(南在)의 현손(玄孫)이다. 북병사(北兵使)남치근(南致勤)의 조카이고, 영의정심열(沈悅)의 장인이다. 양주목사(楊州牧使) 때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창건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9세였다.[<사마방목>] 과거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공부,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였는데, 박순(朴淳)⋅허엽(許曄)⋅박민헌(朴民獻) 등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때 허엽의 초당(草堂)에서 홍인우(洪仁祐)가 남언경의 수준 높은 학문에 감탄하여 자기 누이를 중매하여 매부(妹夫)로 삼았다고 한다. 남언경은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유일(遺逸)로 남아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와도 교류하며, 주자학(朱子學)의 이기설(理氣說)과 양명학(陽明學)의 심즉리(心卽理)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1566년(명종 21) 명종이 유일(遺逸)을 발탁하려고 이조에 명하여 경명(經明)⋅행수(行修) 등 6가지 항목에 뛰어난 인물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남언경과 이항(李恒)⋅성운(成運)⋅임훈(林薰)⋅김범(金範)⋅한제(韓臍) 등 6명이 추천되었다. 이때 남언경이 나이 39세 때였는데, 명종이 특별히 헌릉(獻陵) 참봉(參奉)남언경을 지평현감(砥平縣監)에 임명하였다. 남언경이 배사(拜辭)하는 날 명종이 호초(胡椒) 1말을 내려주고 말하기를, “지평현감남언경은 보통 수령과 같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주는 것이다.” 하였다.[『명종실록』 21년 7월 17일 2번째기사]그 뒤에 명종이 유일로 천거된 6명을 불러서 사정전(思政殿)에서 시험하였는데, 가장 나이가 적은 남언경이 훌륭한 대답을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명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중국 명나라 사신이 나오자, 접반사(接伴使)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이이(李珥)⋅기대승(奇大升)⋅노수신(盧守愼)⋅윤근수(尹根壽)⋅이제신(李濟臣) 등과 함께 뽑혀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 이때 접반사로 뽑힌 사람들은 나중에 유명한 유학자가 되거나, 또는 선조 때 명신(名臣)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봄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형제들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1571년(선조 4) 사재감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청풍군수(淸風郡守)가 되었다.

1573년(선조 6) 이재(吏才)와 덕망(德望)이 뛰어나다고 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양주목사남언경이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세워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을 배향(配享)하였다.

1574년(선조 7)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과거 출신이 아닌 유일(遺逸) 가운데 덕망(德望)이 있는 자를 골라서 간관(諫官)에 임명하도록 선조에게 건의하여, 남언경이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남언경은 상소하여 사양하고, 어머니 병환을 간호하기 위하여 그대로 양주 목사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한다.[묘갈명] 그해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그 뒤에 내섬시⋅장악원⋅사복시의 정(正)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76년(선조 9) 상의원 정(正)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그때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분당(分黨)이 일어나서, 당쟁(黨爭)이 격화되자, 서인의 태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벼슬에서 물러나서 파주로 돌아갔다. 이에 집의남언경이 이를 만류하고 탄식하다가, 당쟁을 진정시킬 방도가 없었으므로, 남언경도 벼슬을 그만두려고 생각하였다.[묘갈명]

1578년(선조 11) 나이 51세 때 둘째부인 유씨(柳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1581년(선조 14)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율곡 이이(李珥)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었다. 그때 동인들이 서인의 영수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공격하였는데, 대사헌이이와 집의남언경이 정철을 변명하여 구원하려고 하였다. 이때 동인 출신 사간원 정언(正言)윤승훈(尹承勳)이 두 사람을 탄핵하기를, “대사헌이이는 정철을 변호하여 구원하고, 집의남언경은 그 시비(是非)를 분변하지도 않으니, 파직하도록 하소서.”하였으므로, 남언경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묘갈명] 그 뒤에 남언경은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서 참의(參議)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83년(선조 16) 외직으로 나가서 파주목사(坡州牧使)가 되었는데, 틈을 내어서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서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 등 경서(經書)의 어려운 부문을 해석하고 토론하였다.[묘갈명]

1587년(선조 20)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는데, 전주 출신 정여립(鄭汝立)과 가깝게 지내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정여립(鄭汝立)에게 장정 5백여 명을 뽑아서 훈련시키게 하였다. 그때 전주부사남언경은 정여립의 집에 가서 야장(冶匠)을 시켜서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 5번째기사]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어, 좌의정정철(鄭澈)이 위관(委官: 재판장)이 되어, 그 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 남언경이 정여립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혐의가 속속 드러났다. 남언경이 3년 전에 전주 부윤으로 있을 때에 왜구(倭寇)를 막기 위하여 정여립에게 장정을 뽑아서 훈련시키게 하였는데, 나중에 정여립이 이것을 확대하여 각지에서 장정을 모아서 훈련시키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모반을 일으키려고 도모하였으며, 또 전주 부윤남언경이 정여립의 장수(將帥)의 재능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서 정여립에게 주었는데, 그 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은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면서 정여립과 가깝게 지내던 이발(李潑) 등 수많은 동인들을 체포하여 죽였다. 그러나 서인 남언경이 정여립과 가깝게 지낸 사실은 정여립 일당의 공초(供招)에서 거듭 나왔으나, 사헌부 지평(持平)강찬(姜燦)이 남언경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위관(委官) 정철(鄭澈)이 그를 구원하여, 마침내 선조가 남언경을 용서하여 주었다. 그때 동인 가운데 북인(北人)들은 위관 정철이 그와 가까운 서인 남언경을 임의대로 풀어주고 죄 없는 북인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였다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1589년(선조 23) 남언경은 벼슬을 그만두고, 경기 양근(陽根) 영천동(靈泉洞)으로 돌아와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1592년(선조 26) 4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박순(朴淳)⋅정엽(鄭曄)⋅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다. 경기 인근 지역과 홍천(洪川)⋅춘천(春川) 등지에서 3백 60여명의 의병(義兵)을 모으자, 행재소(行在所)에서 남언경을 소모사(召募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소모사남언경은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는 왜적과 싸웠는데, 그 공으로 그해 말에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중국 명나라에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4만 5천여 명의 원군을 파견하였는데, 그 지휘관 중에는 양명학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았다. 명나라 장수들은 그들을 맞이하여 안내하는 조선의 접반사(接伴使)와 그 종사관(從事官)들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우도록 권장하였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동인의 태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서인의 태두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주자학의 이기설(理氣說)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받아들이고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 학설을 부정하였으므로, 동인과 서인이 주도하던 조선 조정에서는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1593년(선조 27) 공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는데, 남언경은 양명학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주자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제자 이요(李瑤)는 선조에게 양명학을 찬양하고, 스승 남언경의 주장이라고 일컬으면서 왕세자 광해군(光海君)을 중국 명나라에 보내어 양명학을 배워 오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대소 관료들은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므로, 대간(臺諫)에서 남언경와 그의 제자 이요가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천명하였다고 맹렬히 탄핵하여, 마침내 삭탈관직되었다. 양명학을 천명하다가 최초로 조정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남언경을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라고 일컬었다. 남언경은 낙향하여 양명학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다가, 1594년(선조 28) 5월 26일에 지병으로 양근(陽根) 영천동(靈泉洞)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67세였다.[묘갈명]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영민하고 정밀하여 양명학의 이론에 밝았고, 성리학의 강론에 뛰어났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는 언제나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남언경은 1528년(중종 23) 12월 25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있던 아버지 남치욱(南致勗)과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 사이의 아들 4형제 중에서 둘째 아들이었다.형 남언순(南彦純)은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지도를 받아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동생 남언진(南彦縝)은 이항(李恒)의 문인인데, 진사(進士)로서 사평(司評)을 지냈고, 동생 남언기(南彦紀)는 서경덕(徐敬德) 문인인데, 진사(進士)로서 별좌(別坐)를 지냈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아버지 남치욱(南致勗)과 삼촌 남치근(南致勤)을 가르친 스승인데, 『대학(大學)』에 정통하고, 문무를 겸전하여 무술에 뛰어났었다. 이에 그의 지도를 받은 아버지 남치욱⋅삼촌 남치근⋅맏형 남언순이 모두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그 집안이 무과 장원 급제로 유명하였다. 중국의 주자학과 양명학이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파가 나누어졌으므로, 『대학』에 정통한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남언경의 양명학을 연구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남언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많아서, 주위 사람들은 비범하다고 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소년 시절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면서, 화담학파(花潭學派)의 대선배 박순(朴淳)⋅허엽(許曄)⋅박민헌(朴民獻) 등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세계를 넓혔다.[묘갈명] 화담 서경덕은 제자들에게 유교(儒敎)의 경전(經典)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도교⋅불교의 서적까지 폭넓게 공부하도록 권장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우계 성혼과는 다른 점이었다. 화담 서경덕에게 수학한 남언경은 일찍이 중국 명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왕양명(王陽明)의 『전습록(傳習錄)』을 구하여, 한참도 손에서 떼지 않고 친구 홍인우(洪仁祐)와 함께 열심히 탐독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홍인우는 화담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던 절친한 친구였다.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명나라 원군이 대규모로 우리나라에 파견되자, 명나라 원군의 지휘관 중에는 양명학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남언경은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를 수용하고 주자학의 이기설(理氣說)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1546년(명종 2) 남언경이 19세 때에 허엽(許曄)의 초당(草堂)에서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과 『심경(心經)』의 부주(附註)를 강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하였던 홍인우(洪仁祐)는 그의 높은 학식에 감탄하고 그의 밝은 기상에 매혹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홍덕연(洪德演)에게 남언경의 학문과 인품을 말씀드리고 그의 누이 홍씨(洪氏)를 시집보내어, 남언경을 매부로 삼았다고 한다.[묘갈명] 이에 남언경은 19세 때에 남양홍씨(南陽洪氏)와 혼인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나, 첫째부인 홍씨는 젊은 나이에 병사(病死)하였다. 남언경의 처남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가 매일 기록한 『치재일록(恥齋日錄)』을 보면, 남언경은 사암(思菴) 박순(朴淳)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는데 밤이 깊은 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며, 또 남언경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토론할 때에도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치재유고(耻齋遺稿)』 권2] 사암 박순은 서인의 영수로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퇴계 이황은 당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있으면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명종이 조정으로 부르면 가끔 나와서 벼슬하였다, 그때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있었는데, 나이 19세의 소년 남언경과 밤을 새워 토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남언경이 편지로써 이기설(理氣說)과 심성론(心性論)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이황이 회답한 답서(答書)가 『퇴계집(退溪集)』에 무려 9통이나 실려 있고, 별지 「정재기(靜齋記)」에는 남언경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퇴계전서(退溪全書)』 권42]

이황이 남언경에게 보낸 글을 보면, “전번에 토론할 때에 정(靜)할 때에는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은 까닭에 이(理)가 저절로 있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 뜻은 맹자(孟子)가 논한 성선설(性善說)과 같은 것이며, 또한 근본을 추구하고 근원을 궁구하여 말한 것이다. 이(理)는 정(靜)한 데에만 있고 동(動)한 데에는 없는 것이 아니고, 기(氣)도 또한 정(靜)한 데에는 없고 동(動)한 데에만 있는 게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하니, 남언경이 이황에게 글을 보내기를,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의심스럽습니다. 이와 같다면, 기(氣)에는 한정이 있어서 다만 동(動)하는 곳에서만 유행(流行)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靜)하므로 기(氣)가 용사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기(氣)라는 것은 정(靜)한 곳에는 없고 동(動)한 곳에만 있으며, 이른바 이(理)란 것은 정(靜)한 곳에서는 밝고 동(動)한 곳에는 어두운 것이니, 어찌 그 이(理)와 기(氣)가 하나로 합하고 유행(流行)하여 끝이 없는 오묘함을 보겠습니까.” 하였다.[『퇴계전서(退溪全書)』 권42] 이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두 사람의 편지를 보고 말하기를, “퇴계 이황은 다만 말하기를, ‘기(氣)는 용사(用事)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나, 일찍이 ‘기(氣)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동강(東岡) 남언경은 말하기를, ‘정(靜)한 곳에는 없고 동(動)한 곳에만 있다.’고 말한 것은 퇴계의 학설에 대한 비판으로는 부적당하였다.” 하였다.[『하곡집(霞谷集)』 권12]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근(楊根) 영천(靈泉)의 언덕에 있는데,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송시열의 5대손)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성담집(性潭集)』 권19] 무덤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설악면 이천리 영천 마을[靈川洞]에 있다. 영천 마을에 있는 묘지는 남언경이 생전에 자신이 죽어서 묻힐 복거지(卜居地)로 정한 곳이다. 1694년(숙종 21) 12월에 설악면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지금까지 매년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에 그 후손들이 모여서 제향하고 있다.

첫째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중추부 첨지사(僉知事)홍덕연(洪德演)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고, 둘째부인 천안전씨(天安全氏)는 중랑 부장(中郞副將)전관(全琯)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남권(南權)은 주부(主簿)를 지냈고, 차남 남격(南格)은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장녀는 생원(生員) 최남수(崔南秀)에게 시집갔는데, 첫째부인 홍씨가 낳은 딸이다. 차녀는 참판(參判)권진기(權盡己)에게, 삼녀는 현감(縣監)황곤후(黃坤厚)에게, 사녀는 영의정심열(沈悅)에게 각각 시집갔는데, 둘째부인 전씨가 낳은 딸들이다.[묘갈]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갈천집(葛川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금계집(錦溪集)』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언(記言)』
  • 『기축록(己丑錄)』
  • 『남계집(南溪集)』
  • 『남명집(南冥集)』
  •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 『농암집(農巖集)』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대산집(大山集)』
  • 『도곡집(陶谷集)』
  • 『독석집(獨石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강집(東岡集)』
  • 『두타초(頭陀草)』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문소만록(聞韶漫錄)』
  • 『문월당집(問月堂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미암집(眉巖集)』
  • 『백담집(栢潭集)』
  • 『사계유고(沙溪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고(象村稿)』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서원등록(書院謄錄)』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성담집(性潭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재집(省齋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재집(穌齋集)』
  • 『송강집(松江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암유고(守庵遺稿)』
  • 『아계유고(鵝溪遺稿)』
  • 『야곡집(冶谷集)』
  • 『약포유고(藥圃遺稿)』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우계집(牛溪集)』
  • 『우복집(愚伏集)』
  • 『월사집(月沙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은봉전서(隱峯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일재집(一齋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정암집(靜菴集)』
  • 『조천기(朝天記)』
  • 『존언(存言)』
  • 『지천집(芝川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청계집(靑溪集)』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촌은집(村隱集)』
  • 『치재유고(遺稿)』
  • 『태천집(苔泉集)』
  • 『택당집(澤堂集)』
  • 『퇴계전서(退溪全書)』
  • 『퇴계집(退溪集)』
  • 『치재유고(耻齋遺稿)』
  • 『하곡집(霞谷集)』
  • 『하의유고(荷衣遺稿)』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혼정편록(混定編錄)』
  • 『화담집(花潭集)』
  • 『후광세첩(厚光世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