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유(都慶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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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6년(선조 29)∼1636년(인조 14) = 41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평양서윤(平壤庶尹)이고, 증직(贈職)은 승지(承旨)이다. 자(字)는 내보(來甫)이고, 호(號)는 낙음(洛陰)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거주지는 대구(大丘)이다. 아버지는 초계군수(草溪郡守)도원량(都元亮)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미락재(彌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방목>]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세자를 호남으로 호종하였다. 난이 끝난 후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가,[『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5년 10월 25일] 황해도 은율현감(殷栗縣監)으로 나갔다.

1630년(인조 8) 부원수정충신이 은율현감도경유에게 가도(假島) 유흥치(劉興治) 관하(管下)의 도사(都司) 하상진(夏尙進)을 회유하도록 하였는데, 하상진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1633년(인조 11) 봉산군수(鳳山郡守)에 임명되었다.

1634년(인조 12) 황해도암행어사오전(吳竱)이 봉산군수(鳳山郡守)도경유의 치적(治績)이 높다고 보고하였는데, 그 해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전임되었다.[『모당선생문집(慕堂先生文集)』 권8]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심연(沈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쌍령(雙嶺) 전투에서 우영(右營)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패전하였다. 그 죄로 평해군(平海郡)으로 유배되었는데, 도중에 좌찬현(佐贊峴)에 이르렀을 때 탄환을 맞고 죽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5년 8월 14일] 그 후 화약고의 폭발사고가 전에 도경유에게 처형당한 비장(裨將) 박충겸(朴忠謙)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저지른 소행임이 밝혀지면서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낙음집(洛陰集)』이 있다.

묘소

대구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사마방목(司馬榜目)』
  • 『낙재집(樂齋集)』
  • 『남촌집(南村集)』
  • 『담정유고(藫庭遺藁)』
  • 『등암집(藤庵集)』
  • 『모당집(慕堂集)』
  • 『성재집(性齋集)』
  • 『속잡록(續雜錄)』 『양파유고(陽坡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우복집(愚伏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하음집(河陰集)』
  • 『호곡집(壺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