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숙(羅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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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5년(연산군 1) 전후(추정)∼1546년(명종 1) = 50세 전후(추정).]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다. 자(字)는 선원(善源)이다. 본관은 안정(安定)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창릉참봉(昌陵參奉)나세걸(羅世傑)이고, 어머니 풍양조씨(豐壤趙氏)는 대사헌조익정(趙益貞)의 딸이다. 선릉참봉(宣陵參奉)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의 동생이다. 형 나식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道學)에 정통하였으므로, 동생 나익(羅瀷)과 함께 형 나식에게 글을 배웠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형 나식과 함께 화(禍)를 당하였으므로, ‘<을사명현(乙巳名賢)의 두 나씨[二羅]>’라고 일컬어진다.

중종 시대 활동

1522년(중종 1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다.[<사마방목>]

1524년(중종 19)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1525년(중종 20)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38년(중종 31)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1540년(중종 35)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541년(중종 36)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1543년(중종 38)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

1544년(중종 39)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知)⋅좌부승지(左副承知)로 승진되었다. 중종 말년에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세자(世子: 인종)를 폐위하고 자기가 낳은 대군(大君: 명종)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의 대윤(大尹) 일파는 세자를 보호하려고 하였으나,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少尹) 일파는 세자를 폐출하려고 하였다. 이때 나숙의 형 나식(羅湜)은 대윤(大尹)의 중심인물이 되어, 윤원형의 소윤(少尹) 일파와 치열하게 싸웠다.

인종 시대 활동

1544년(인종 즉위) 11월에 인종이 즉위하자, 그 외삼촌 윤임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를 등용하였는데, 나식도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에 임명되었다. 이때 형 나식(羅湜)이 대윤의 윤임을 도와서 사림파의 신진 세력을 조정으로 끌어들이고, 소윤의 윤원형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부제학나숙은 소윤의 윤원로(尹元老: 윤원형의 형)을 탄핵하여 유배시켰다. 그러나 병약한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도 체 되지 않아서 31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 7월에 겨우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정권을 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대윤의 윤임 일파와 사림파를 일망타진하였다. 이에 나숙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강원도 철원(鐵原)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546년(명종 1) 함경도 경원(慶源)에 안치(安置)되어, 사사(賜死)되었다. 형 나식도 그때 윤임의 대윤 일파라고 하여, 경상도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평안도 강계(江界)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사사(賜死)되었다. 형제가 같은 날에 동시에 사사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을사명현(乙巳名賢)의 두 나씨[二羅]’라고 일컫고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1568년(선조 1) 영의정이준경(李逡慶)의 상소로 인하여 나숙⋅나식 형제가 모두 신원(伸寃)되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정직하고 솔직하여, 남에게 바른말을 곧잘 하였다.

나숙과 나식 형제는 평소 이휘(李煇)와 가깝게 지냈는데, 이휘는 대윤 윤임의 사위 이덕응(李德應)과 절친한 사이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서 윤임의 대윤 일파가 화(禍)를 당할 때 윤임의 사위 이덕응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덕응이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같이 역모(逆謀)를 도모한 사람으로 평소 자기와 가장 친한 이휘를 끌어들였다. 이휘가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이휘와 가장 친한 사람 이조 정랑이중열(李中悅)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먼저 글로써 자백하기를, “작년 12월에 신은 이휘가 병을 앓는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났더니, 이휘가 말하기를, ‘근래 대윤·소윤이라는 말이 많이 나도는데, 이것을 어찌 처리해야 되겠는가.’하므로, 신이 윤원형과 그의 형 윤원로의 관작을 올려주어 소윤을 섭섭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였으나, 이휘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이휘가 와서 말하기를, ‘전날의 네 말을 나는 매우 옳다고 여겼으나, 다른 분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이 나를 책망하기를, ⌜젊은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구차한 소리를 하느냐⌟고 하더라.’ 하였습니다. 신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이휘가 대답을 아니 하다가, 자꾸 다그쳐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식⋅나숙 형제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나식⋅나숙 형제도 체포되어, 이휘와 함께 대질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휘가 진술하기를, “이중열이 신의 집에 왔을 때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뒤에 그 말이 전파되자, 나식은 신의 말이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나식을 만나려고 그 집에 갔는데, 나식은 마침 밖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그 아우 나숙을 만났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형이 한 말을 나는 잘 모르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옳으며, 또 그렇게 하여야만, 세자(世子: 인종)와 대군(大君: 명종)이 서로 화평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0] 이 일은 중종 말년에 있었는데, 중종의 원비(元妃)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은 세자(世子: 인종)와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은 대군(大君: 명종)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의 대윤 일파와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때 나식⋅나숙 형제는 대윤 일파가 되어, 소윤 일파와 싸우다가, 인종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와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유임의 대윤 일파를 일망타진할 때 나식⋅나숙 형제는 <이휘의 옥사>에 연루되어 참화(慘禍)를 당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계곡집(谿谷集)』
  • 『기언(記言)』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계집(東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모주집(茅洲集)』
  • 『목재집(木齋集)』
  • 『문곡집(文谷集)』
  • 『미암집(眉巖集)』
  • 『백사집(白沙集)』
  • 『봉록집(鳳麓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야계집(倻溪集)』
  • 『어촌집(漁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
  • 『지퇴당집(知退堂集)』
  • 『지호집(芝湖集)』
  • 『충재집(冲齋集)』
  • 『학곡집(鶴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