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具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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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1년(명종 16)~1600년(선조 33) = 40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보을하 첨사(甫乙下僉使)이고, 봉작(封爵)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며, 증직(贈職)은 병조 참판(參判)이다. 자(字)는 사호(士浩)이고, 호(號)는 인산(釼山)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비인(庇仁)이다. 아버지는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구종숙(具宗淑)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3년(선조 16) 알성(謁聖) 무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무과방목>]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 이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함경도를 침략하였는데, 구황은 오촌 권관(吾村權管)으로서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휘하에서 길주(吉州)의 장덕산(長德山)에 이어 단천(端川)의 쌍포(雙浦)에서 왜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1593년(선조 26) 훈련원 정(正)으로서 단천군수(端川郡守)강찬(姜燦) 휘하의 1대장이 되어 왜적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웠고, 곧 이어 함경북도 회령의 보을하 첨사에 임용되었다. 그 해에 대구부사(大丘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수령관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교체되었다. 이후 우후(虞候)를 거쳐 다시 보을하 첨사가 되었는데, 1600년(선조 33)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7월 15일 전사하였다.[『사류재집(四留齋集)』] 선조(宣祖)가 이를 애석하게 여겨 병조 참판(參判)에 추증하였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후손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후(李詡)의 딸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무과방목(武科榜目)』
  • 『겸재집(謙齋集)』
  • 『구암집(龜巖集)』
  • 『농포집(農圃集)』
  • 『동림집(東林集)』
  • 『백사집(白沙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연재집(淵齋集)』
  • 『퇴계집(退溪集)』
  • 『해월집(海月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