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음(具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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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4년(광해군 6)∼1683년(숙종 9) = 70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정원 승지(承旨)이다. 자(字)는 차산(次山)이고, 호(號)는 명곡(明谷)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진사(進仕)구인지(具仁至)이고, 어머니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찰방(察訪)이안성(李安性)의 딸이다. 이식(李植)의 문인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에서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사마방목>]

효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 3) 증광(增廣) 문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의금부 도사에 보임되었고, 1655년(효종 6) 호조 정랑이 되었으나, 노모를 위해 외직을 청하여 황주판관(黃州判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 직강(直講)과 공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69년(현종 10)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숙종 시대 활동

1679년(숙종 5)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 실시된 문신 중시(重試)에서 장원하면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았고, 이듬해 간성군수(杆城郡守)가 되었다. 그러나 1681년(숙종 7) 사헌부에서 죄인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시문(詩文)을 주고받은 일로 탄핵하자, 본인이 직접 나서서 그 당사자는 동명이인임을 밝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저서로는 『명곡집(明谷集)』이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파주 광탄리(廣灘里)에 있고, 이웅징(李熊徵)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풍천임씨(豊川林氏)는 임경달(任慶達)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현감(縣監)을 지낸 구문유(具文游)이다. 장녀는 이응번(李應蕃)의 처이고, 차녀는 정랑(正郞)권처경(權處經)의 처이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귀암집(歸巖集)』
  • 『만구집(晩求集)』
  • 『명곡집(明谷集)』
  • 『송계집(松溪集)』
  • 『야곡집(冶谷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연도기행(燕途紀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척암집(拓菴集)』
  • 『향산집(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