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정(具志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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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7년(인조 25)∼1713년(숙종 39) = 67세.] 조선 중기 현종~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황주목사(黃州牧使)이다. 자(字)는 지숙(志叔)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판서를 지낸 능풍부원군(綾豊府院君) 구인기(具仁墍)이고, 아버지는 진사(進士)구일(具鎰)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66년(현종 7) 사마시(司馬試)에서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사마방목>] 이후 음관(蔭官)으로서 현감(縣監)이 되었다.

숙종 시대 활동

『해동가요(海東歌謠)』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그의 시조가 실려 있는데, 세도정치의 부패상을 풍자하는 한편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구가하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1689년(숙종 15) 대사간(大司諫)정유악(鄭維岳)으로부터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한다는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서용되었다.

1697년(숙종 23)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인물을 천거해서 임용하자는 중추부 영사(領事)남구만(南九萬)의 건의에 따라 구지정은 음관으로서 조상우(趙相遇)의 추천을 받았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나갔으나, 1706년(숙종 32)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사(御史)김흥경(金興慶)으로부터 죄를 받았다.

1711년(숙종 37) 황주목사(黃州牧使)로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검재집(儉齋集)』
  •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
  • 『능성구씨세보(綾城具氏世譜)』
  • 『저촌유고(樗村遺稿)』
  • 『청구영언(靑丘永言)』
  • 『해동가요(海東歌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