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맹영(高孟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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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2년(연산군 8)~1565년(명종 20) = 64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다. 자(字)는 영지(英之)이고, 호(號)는 하천(霞川)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아버지는 형조 좌랑고운(高雲)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이호선(李好善)의 딸이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버지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37년(중종 3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사마방목>] 1540년(중종 35) 별시(別試) 문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문과방목>]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예조 좌랑이 되었고, 1547년(명종 2) 사헌부 감찰(監察)이 된 뒤, 1550년(명종 5)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551년(명종 6)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나갔는데,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푼 공으로 명종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558년(명종 14) 이후 내직으로 들어와 사간원 헌납(獻納)과 사간(司諫), 사헌부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고, 1560년(명종 15)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거쳐서, 1561년(명종 16)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인 1562년(명종 17)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된 이후, 1년 사이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홍문관 부제학(副提學)⋅병조 참의(參議)⋅이조 참의⋅호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명종 18) 권신(權臣) 이량(李樑)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어 거듭 탄핵을 받았는데, 1565년(명종 21) 이량의 실각과 함께 유배당하였다.

후손

부인 남평서씨(南平徐氏)는 서걸(徐傑)의 딸이다. 슬하에 1남을 두었는데, 아들은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고봉집(高峯集)』
  • 『구촌집(龜村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금계집(錦溪集)』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목재집(木齋集)』
  • 『백주집(白洲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정집(月汀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제봉집(霽峯集)』
  • 『제호집(霽湖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청사집(晴沙集)』
  • 『퇴계집(退溪集)』
  • 『후광세첩(厚光世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