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개방(盧蓋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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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3년(명종 18)∼1592년(선조 25) = 30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동래교수(東萊敎授)이고,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이다. 자(字)는 유한(維翰)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유학(幼學) 노일(盧馹)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바다를 건너온 왜군이 처음으로 동래성(東萊城)을 공격할 때 동래부사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문과방목>] 성균관 권지(權知) 학유(學諭)로 보임되었다가, 동래향교(東萊鄕校)의 교수(敎授)로 옮겨서 부산의 유생(儒生)들을 가르쳤다.

1592년(선조 25) 봄에 동래교수노개방은 말미를 얻어 고향 밀양으로 근친(覲親)하러 갔는데, 그해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의 9부대 15만여 명이 바다를 건너서 차례로 부산으로 상륙하였는데, 왜군이 처음으로 동래성(東萊城)을 공격하였다. 밀양에서 휴가 중에 있던 노개방은 왜적이 동래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동래 향교로 달려왔는데, 향교가 동래성 밖에 있어서 왜군의 공격을 쉽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노개방은 향교 유생 문덕겸(文德謙)⋅양통한(梁通漢) 등과 함께 한밤중에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동래성의 곁문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들기고 통곡하니, 동래 부사송상현(宋象賢)이 그들을 성안으로 받아들이었다. 노개방과 그 제자들은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성안의 청결한 누각(樓閣)에 봉안(奉安)한 다음에, 공자의 위패 앞에서 예(禮)를 행하였다. 그 뒤에 노개방은 문덕겸⋅양통한 등의 제자들과 함께 공자의 위패를 지키면서 한참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동래성이 함락되었을 때 노개방과 그 제자들은 그 누각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죽었다.[『천곡집(泉谷集)』 권2]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될 때 동래성 안에 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그 시신을 찾을 길이 없었다. 노개방이 죽은 뒤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동래의 충렬사(忠烈祠), 밀양의 충효사(忠孝祠)에 제향되었다.

노개방의 부인은 밀양(密陽)에 남아 있다가, 전란을 피하여 산골짜기로 피난을 갔는데, 갑자기 왜군을 만나자, 젊은 부인은 노개방의 홍패(紅牌)를 가슴에 품고 낭떠러지 아래로 투신(投身)하여 죽었다.[『천곡집(泉谷集)』 권2]

성품과 일화

성품이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도(正道)를 자키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노개방은 항상 시서(詩書)를 팔뚝에 매고 다닐 정도로 학문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여, 선비들의 추앙을 많이 받았다. 노개상은 일찍부터 출세할 뜻이 없어서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나, 부모님의 강력한 권유로 말미암아 마지못해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가서 30세의 짧은 일생을 장렬하게 끝마치자, 많은 선비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낙재집(樂齋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노봉집(老峯集)』
  • 『동강유집(東江遺集)』
  • 『서애집(西厓集)』
  • 『서원등록(書院謄錄)』
  • 『소눌집(小訥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유회당집(有懷堂集)』
  • 『자유헌집(自濡軒集)』
  • 『전고대방(典故大方)』
  • 『지호집(芝湖集)』
  • 『천곡집(泉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