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상전(集祥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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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인선왕후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조성한 대비의 전각.

개설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실에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와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있었다. 인선왕후는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부부인(府夫人) 시절을 보내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인선왕후는 심양에 있을 때 현종을 낳았으나 현종은 4살 되던 해에 조선으로 홀로 돌아왔다. 그리고 심양에 남아 있는 부모와 만날 수 있기를 해에게 기원했을 만큼 효성이 깊었다. 왕이 되어서는 어머니의 일상을 보살피며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다하였다. 그러한 성품인 까닭에 인선왕후의 거처에 문제가 생기거나 인선왕후가 병에 걸리면, 인선왕후를 모시고 궁을 옮기는[避殿] 일이 잦았다. 예를 들어 인선왕후의 처소인 통명전(通明殿)에서 도깨비의 변괴가 일어났을 때, 효종은 대비전을 건립하라 명하고 공역이 끝날 때까지 인선왕후를 대조전(大造殿)에 모셨다. 그리고 자신은 가까운 별실에 기거하며 밤낮으로 봉양하였다.

이 시기 조선은 예학의 논쟁이 끊임없던 때였다.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박해했다는 표면적 이유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왕실의 가장 웃전인 대비에게 지극한 예를 올리는 것은 왕에게 있어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다. 병약한 어머니의 처소에서 일어난 흉한 변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효종 때 이미 대비전의 대대적 영건이 너무 많았던 까닭에 신하들의 의견은 부정적이었고 새로운 대비전을 계획하는 효종은 수많은 반대에 시달렸다. ‘효’와 백성의 고된 삶 사이에서 갈등하던 현종은 경덕궁의 한 전각을 옮겨 따로 터를 마련하지 않고 대조전의 영역 안에 조성하는 것으로 대비전 공역을 마무리하였다. 이 집이 집상전이다[『현종실록』 행장].

위치 및 용도

집상전은 대조전의 영역 안에 들어 있던 집상당(集祥堂)의 터에 새롭게 조성한 집이다. 대조전의 뒤뜰 동북쪽 너른 마당에 놓여 있고 대조전 동행각과 집상전 동행각이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영역으로 보인다. 서편에는 경훈각(景薰閣)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 북쪽에는 대조전 후원의 화계(花階)가 조성되어 있다. 화계를 감싼 담장 사이에 작은 문을 내고 후원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연결하였다.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새로 조성한 대비전이다.

변천 및 현황

현종은 창덕궁에서 즉위하였지만 바로 경덕궁으로 이어하였고 3년간 머물렀다. 법궁인 창덕궁을 오래 비워 둘 수 없었으므로 창덕궁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간략하게 동궐 수리를 끝내라고 명하였다. 동궐로 돌아왔을 때, 장렬왕후는 효종이 자신을 위해 건립한 만수전(萬壽殿)에 줄곧 머물렀고 새로 대비가 된 인선왕후는 대비의 궁궐인 창경궁의 통명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궁궐에서는 유난히 많은 재변이 일었다. 심지어 통명전에는 도깨비가 출몰했고 이 때문에 인선왕후는 시달림을 당하였지만 번거롭게 하기 싫다며 거처 옮기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변고에 2년여를 시달리는 대비를 보다 못한 왕은 경덕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결정하였다.

경덕궁의 수리를 명하였고 곧 이어했으나 왕대비는 법궁을 오래 비워 둘 수는 없다면서 동궐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다시 돌아와 거처한 통명전은 여전히 변괴의 정황이 사라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왕은 경복궁의 빈터에 새 대비전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완강히 반대하는 신료들의 의지와 경복궁에 홀로 거처할 어머니를 걱정하여 창덕궁 대내로 공역을 변경하였다. 가장 가까운 장소에 간략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끝에, 대조전 후원 ‘집상당’ 옛터에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와 옮겨지었다(『현종실록』 8년 11월 11일).

1647년(인조 25)으로 거슬러 올라가, 창덕궁과 창경궁을 전면 수리한 ‘대내(大內)’ 정비 기록을 살펴보면 창덕궁 대조전 구획 안에 집상당이 들어 있었다. 이때 보수된 기존의 집상당은 대청마루, 툇마루, 온돌을 합쳐 20칸 규모였고 행각 2칸 반이 달려 있는 대조전의 별당 같은 집이었던 것 같다(『인조실록』 25년 11월 12일).

현종은 이 집상당을 보수하여 집상전으로 격상시키고 대비를 모셨다. 집의 규모가 왕대비의 정당으로 삼기에 모자랐으므로 왕은 경덕궁의 집희전을 헐어 와 집상당 자리에 짓게 하였다. 이렇게 대비전으로 조성된 후, 며느리인 명성왕후(明聖王后)도 이곳에 거처하였다. 어느 때 소실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헌종 연간에 발간된 『궁궐지(宮闕志)』에는 ‘지금은 헐리고 없는 전각’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았을 때 1833년(순조 33) 순조대 내전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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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동궐도(東闕圖)」에 나타난 대로 집상전은 대조전 영역 안에 들어 있어 독립된 영역을 만들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주변 상황을 보았을 때, 때로는 부분적으로 판장(板牆)을 이용한 구획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전각은 정면 7칸, 전후의 퇴를 포함한 측면 4칸 규모에 마루를 덧달고 난간을 둘러 형태미를 갖추었다. 중앙 대청과 그 전면 중앙에만 설치된 두 단의 월대와 좌우익실의 전면은 장초석으로 높여 놓은 정면성, 그리고 동측 행각을 한 겹 더 감싸는 담장과 그 안의 화계 등이 대비전의 구성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집상전은 장소의 특성상, 동행각만 조성되었지만 의례 장소로 사용될 때 판장 등으로 공간 구획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궤에는 좌우 익실을 포함한 전각이 28칸이고 익실은 온돌을 설치하였으며 행각이 11칸 달려 있다고 기록하였다. 경덕궁의 집희전을 집상전으로 옮겨 놓았던 이때의 이건(移建)은 재정을 낭비하지 않고 ‘당(堂)’이었던 전각을 ‘전(殿)’으로 바꿈으로써 대비를 모실 전각을 완성한 셈이었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백호전서(白湖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집상전수개의궤(集祥殿修改儀軌)』「동궐도(東闕圖)」
  •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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