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유공(慶由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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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전기 세조~성종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경상도 병마사(兵馬使)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거주지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경윤(慶胤)이다.

세조 시대 활동

1462년(세조 8) 도둑 10여 명이 돈의문(敦義門) 근처에서 환관(宦官)맹인의(孟仁義) 집 소를 약탈하였는데, 세조가 부장(部將)경유공(慶由恭) 등에게 소도둑을 수색해 잡도록 명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도총사(都摠使)이준(李浚)의 군관이 되어 토벌에 참가하였는데, 난이 곧 평정될 것이라는 경유공의 보고를 받은 세조가 기뻐하여 그를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하였다. 그 해에 건주야인(建州野人) 정벌에도 참가하여 군공을 세웠는데, 그 공으로 노비 6명을 하사받았다.

예종 시대 활동

1468년(예종 즉위) 남이옥사(南怡獄事)에 연루되면서 가산을 적몰(籍沒)당하고 관노가 되었다.

성종 시대 활동

1470년(성종 1) 성종이 즉위하면서 관노에서 풀려나 가위장(假衛將)에 임명되었고, 가산(家産)과 노비를 도로 환급받았다.

1472년(성종 3)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었다.

1478년(성종 9)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에 임명되었는데,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곧 이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또 다시 병을 이유로 사직하자, 사헌부 장령(掌令)임수경(林秀卿)으로부터 변방근무를 피하기 위하여 병을 사칭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1480년(성종 11) 포영장(布營將)으로서 야인정벌에 참전하였는데, 군공을 세워 3품계를 가자(加資)받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중추부첨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그해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고, 1483년(성종 14) 영안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예성군(蘂城君) 어유소(魚有沼)와 첩(妾)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는데, 경유공은 어유소(魚有沼)가 중매로 맞아들이려고 한 첩을 국상(國喪) 중에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만들려고 한 죄를 인정받아 파직당하고, 고신(告身: 관직 임명사령장)을 추탈 당하였다.

1489년(성종 20) 서용되어 의주목사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야인이 평안도 변경을 침략하자, 성종은 경유공에게 급히 경군(京軍) 100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름길로 가지 않고, 장모를 찾아보는 등 명령을 어겼는데, 결국 그 죄로 다시 고신을 추탈당하고, 도형(徒刑) 3년에 처해졌다.

1493년(성종 24) 직첩(職牒)을 돌려받고, 1494년(성종 25)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묘소

묘소는 황해도 송화현(松禾縣)에 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室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일성록(日省錄)』[정조]
  • 『사가집(四佳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