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준(南以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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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6년(명종 21)∼1621년(광해군 13) = 56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조 정랑(正郎)⋅사간원 사간(司諫)⋅봉상시 정(正)이다. 자(字)는 사수(士秀)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주부(主簿)남위(南瑋)이고, 어머니 한씨(韓氏)는 한옹(韓蓊)의 딸이다. 남병사(南兵使)남응운(南應雲)의 손자이고, 좌의정남이웅(南以雄)의 조카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 23)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사마방목>]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4세였다.[<문과방목>]

1610년(광해군 2)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1611년(광해군 3)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고 동생 남이웅(南以雄)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때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하였다가 죽이고,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역모(逆謀)로 몰아서 죽일 때 적극 가담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예조 정랑(正郎)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봉상시 정(正)을 거쳐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시키려는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는 서인(西人)의 중진들을 탄핵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함경도 경상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가서,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에 힘썼다.

1621년(광해군 13) 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56세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감수재집(感樹齋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 『당의통략(黨議通略)』
  • 『면우집(俛宇集)』
  • 『암서집(巖棲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주유고(龍洲遺稿)』
  • 『우계집(牛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회재집(晦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