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묘보감(宣廟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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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숙종이 문신 이단하(李端夏, 1625~1689)에게 명해서, 1684년(숙종 10) 『선묘보감(宣廟寶鑑)』 10권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선조 1대의 사적을 엮은 역사서다.

개설

이 책은 1684년 왕의 명에 의해 이단하가 편찬하고, 1731년(영조 7)에 완성된 것으로 선조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 만을 모아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해 간행되었다.

또 영조 때 이덕수(李德壽) 등으로 하여금 숙종의 사적을 찬진케 하여, 1730년(영조 6) 『숙묘보감(肅廟寶鑑)』 15권의 완성을 보았다. 별편(別篇) 1권이 있었으나, 간행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정조 때 조경(趙璥) 등에 명하여, 정종·단종·세조·예종·성종·중종·인종·명종·인조·효종·현종·경종과 영조의 보감(寶鑑)을 착수, 이미 완성되어 있는 세조 때의 『국조보감(國朝寶鑑)』· 『선묘보감』·『숙묘보감』을 합하여, 『국조보감』 68권이 완성되었다. 별편 7권이 있다.

이 책은 지속되지 못하고 있던 열성(列聖)의 보감 펀찬 작업을 중흥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이후 1782년(정조 6)에 68권 22책의 『국조보감』으로 완성된 시발점이 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숙종 때 이단하에게 명해서, 1684년(숙종 10) 『선묘보감』 10권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선조 1대의 사적을 엮은 것이다. 또한 1730년(영조 6)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이덕수 등에게 명해 숙종 1대의 사적을 찬집하여, 『숙묘보감』 15권을 완성하였다.

이어서 1782년(정조 6)에는 정종·단종·세조·예종·성종·중종·인종·명종·인조·효종·현종·경종·영조 등 13조의 보감을 조경(趙璥) 등에게 명해 찬수하게 하였다. 이를 앞의 세 보감과 합해서, 『국조보감』 68권 19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에는 정조의 어제서(御製序)와 서명응(徐命膺)의 진전(進箋), 교정·편집·고교(考校)·어제교열(御製校閱)·감인(監印) 등을 맡았던 인물의 명단, 총서(總序)·범례 및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또, 1847년(헌종 13)에는 찬집청을 두고 조인영(趙寅永) 등에게 명해 정조·순조·익종 때의 보감을 찬수, 이듬해에 이전의 보감과 합해 82권 24책이 이루어졌다.

1908년(융희 2)에는 이용원(李容元) 등에게 헌종·철종 2조의 보감을 찬수하게 하여, 1909년(융희 3)에 전의 것과 합하고, 순종의 어제서와 이용원의 진전을 첨부, 『국조보감』 90권 28책을 완성하였다.

서지 사항

1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금속활자본이다. 상하단변(上下單邊), 좌우쌍변(左右雙邊)이고, 반곽은 25.0×17.1cm이다. 10행 18자의 주쌍행(注雙行), 상하내향2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3.7×22.0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1684년(숙종 10)에 편찬된 책으로서, 조선 후기에 편찬되어 조선 전기와는 달라진 측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특히 보감의 성격상 같은 국왕 관련 자료이면서, 시기변화에 따른 성격변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사상의 한 축인 국왕이나 군신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따라서 『선묘보감』에 인용된 기사를 비교하여 살펴보면, 정치사상에서 조선 후기의 특성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필 수 있다.

이 책의 체제는 원래 송(宋)나라의 국사원(國史院)에서 찬술한 『삼조보훈(三朝寶訓)』의 체제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체제는 정사(正史)인 실록(實錄)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가 되어, 보감의 편찬에 참여한 신하들은 사관(史官)이라고 칭하였다. 이와 같은 보감의 편찬을 실록의 편찬과 동일하게 이해하던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록과 보감이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만은 아니었다.

『선묘보감』은 선조만을 대상으로 편찬된 보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편찬 된 『사조보감』과 거의 같은 분량으로 선조의 재임 년수가 41년으로 긴 것을 고려하더라도, 적지 않은 분량이다. 『선묘보감』의 내용은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그 내용이 크게 변한다. 우선 선조 25년의 기록에는 국왕인 선조를 중심으로 선조의 군덕(君德)을 선양하는 계의 기사가 극으로 선별되었다.

그에 비해 임진왜란 이후에는 임진왜란에 한 경과 조치에 대한 기사가 많이 선별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약 10년에 걸친 기사는 매우 소략하다. 임진왜란의 기사는 『국조보감』에서 통상으로 많이 산견되는 국왕의 가언(嘉言)·선정(善政)에 관련한 내용 외에 선조를 성학(聖學)으로 계도(啓導)하기 위해 경연(經筵)을 시행하거나,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직에 진출한 산림적(山林的) 존재인 처사의 등용에 관련된 내용과 신하들의 졸기(卒記)가 많이 실렸다.

우선 경연계 기사는 이 『사조보감』의 내용보다 자세하고 빈도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선조의 경우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지만 장자가 아니었고, 입승통한 입장이었기에 명종 말년부터 진출한 사림들로서는 국왕의 교육에 해당하는 경연에 어느 때보다도 깊은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즉 정통성이 상으로 취약한 선조의 입장 때문에 유신(儒臣)의 입장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국왕을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성왕(聖王)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기사가 많이 선별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제왕학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단 수식이 많은 것이 흠이다.

참고문헌

  • 김성우, 「선조대 사림파의 정국 장악과 개혁노선의 충돌-선조 8년(1575) 동·서 분당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제132집, 한국사연구회, 2006.
  • 서병패, 「오대산사고본 『선조실록』 판본 연구」, 『서지학보』 제30호, 한국서지학회, 2006.
  • 윤영수, 「이순신과 선조의 차이점은?」, 참언론, 2014.
  • 이웅희,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졸기에 나타난 인물관」, 국민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 이희환, 「선조 대 동·서 분당의 배경과 원인」, 『전북사학』 제27집, 전북사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