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유후(慶有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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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산감역(四山監役)이다. 자(字)는 영숙(永叔)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인데, 1600년대 초 파주의 적성으로 갈라져 나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參判)경섬(慶暹)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극강(李克綱)의 딸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다.[<사마방목>]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과 유희분(柳希奮)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해 대북에 속한 언관과 유생들을 동원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일으켰는데, 정조(鄭造), 윤인(尹認), 이위경(李偉卿) 등이 떠맡고 나서서 폐모론을 발론(發論)하였다. 이때 경유후는 태학장의(太學掌議)로서 학생들을 이끌고 세 번이나 끝까지 상소(上疏)를 올려 정조, 윤인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장인인 유희분과는 이때부터 전혀 왕래하지 않았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의롭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후손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유희분(柳希奮)의 딸인데, 슬하에 아들 7명을 두었다. 장남은 경식(慶寔)이고, 차남은 경인(慶寅)이며, 삼남은 경최(慶㝡)인데,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사남은 경오(慶𡪿)이고, 오남은 경부(慶𡧰)이며, 육남은 경우(慶寓)이고, 칠남은 경채(慶寀)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겸재집(謙齋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원집(杞園集)』
  • 『활재집(活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