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신(南以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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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2년(명종 17)∼1608년(선조 41) = 47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형조의 참판(參判)과 대사헌(大司憲)이다. 자(字)는 자유(子有)이고, 호(號)는 직곡(直谷)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개성부 도사(都事)남호(南琥)이고, 어머니 거창신씨(居昌愼氏)는 신사헌(愼思獻)의 딸이다. 남병사(南兵使)남응운(南應雲)의 손자이고, 도승지(都承旨)남근(南瑾)의 조카이다. 이조 판서남이공(南以恭)의 형이고, 감사(監司)남훤(南翧)의 조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1590년(선조 23) 증광(增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문과방목>]

1593년(선조 26)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에 보임되었다가, 1594년(선조 27)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1595년(선조 28)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고, 그해 말에 예조 정랑(正郎)에 임명되었다.

1596년(선조 29)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1598년(선조 31)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99년(선조 32) 우승지(右承旨)⋅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병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병조 판서는 소북(小北)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었다.

1600년(선조 33) 주문사(奏聞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에 다녀와서, 경기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1601년(선조 34) 경기 감사남이신은 뇌물 사건으로 인하여 면직되었으나, 곧 함경도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1604년(선조 37)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06년(선조 39) 춘추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는데, 당시 춘추관에서 『조선왕조실록』 3질을 새로 인쇄하여 각지에 나누어 보관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607년(선조 40)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608년(선조 41) 1월에 가슴의 흉통(胸痛)으로 사간원에 출근하지 못하다가, 그해 1월 22일에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이 47세였다.

성품과 일화

1600년(선조 33) 2월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감사남이신(南以信)은 위인이 용렬한 데다가 성품조차 비루하여 오래도록 병조 참판에 있으면서 멋대로 매관 매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거기다가 권세를 끼고 기염을 부리며 조금도 꺼려하는 바가 없었으니, 신들이 오늘날 탄핵하는 것은 실로 공공(公共) 의논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선조가 대답하기를, “그대들이 남이신처럼 쓸 만한 사람까지 몰아서 배척하는 것은 공공의 마음이 아니고, 또한 좋은 일도 아니다.” 하였다.[『선조실록』 33년 2월 18일 1번째기사]

1606년(선조 39) 춘추관 동지사(同知事)남이신(南以信)은 당시 춘추관에서 『조선왕조실록』의 전주(全州) 사고본(史庫本) 3질을 새로 인쇄하여 각지에 나누어 보관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星州) 사고(史庫)⋅충주(忠州)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병화(兵火)로 불타버렸고, 오로지 전주(全州) 사고(史庫)에 보관하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옛날 인쇄본은 5백 76권이고 새 인쇄본은 각기 2백 59권인데, 이것은 책의 장정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구 인쇄본은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에 보관하고 신 인쇄본은 서울의 춘추관과 안동(安東)의 태백산(太白山),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또 『조선왕조실록』의 초본(草本) 1질은 강릉(江陵)의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게 하였다가, 처음에 해주(海州)로 옮겼고, 다음에 영변(寧邊)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이때 남이신(南以信)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형조 참판으로서 춘추관 동지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후손

부인 나주정씨(羅州丁氏)는 정윤복(丁胤福)의 딸이다. 아들 남두첨(南斗瞻)은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고, 손자 남훤(南翧)은 과거에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와 항해도 관찰사와 승지(承旨)를 지냈다. 그의 손자 여러 형제 가운데 특히 창명(滄溟) 남훤南翧)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창명공파(滄溟公派)를 이루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고대일록(孤臺日錄)』
  • 『기언(記言)』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매산집(梅山集)』
  • 『명곡집(明谷集)』
  • 『모당집(慕堂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백호집(白湖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시남집(市南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월사집(月沙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정무록(丁戊錄)』
  • 『해좌집(海左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