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南孝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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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4년(단종 2)∼1492년(성종 23) = 39세.] 조선 전기 성종 때의 문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자(字)는 백공(伯恭)이고, 호(號)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생전에 벼슬하지 않았으며, 증직은 좌승지(左承旨)⋅이조 판서(判書)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남전(南恮)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도사(都事)이곡(李谷)의 딸이다. 조선 개국 공신인 영의정남재(南在)의 5대손이고, 집현전 직제학(直提學)남간(南簡)의 증손자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8년(성종 9)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훈구파(勳舊派)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때 도승지임사홍(任士洪)과 영의정정창손(鄭昌孫) 등은 남효온의 죄를 국문(鞫問)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용서하였다.

1480년(성종 11) 어머니의 강권으로 마지못하여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그러나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영월에 귀양 보냈다가 살해한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효온은 과거를 보아 벼슬에 나아갈 생각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세상을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유리방랑하였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서 1492년(성종 23)에 죽었는데, 향년이 39세였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추강냉화(秋江冷話)』⋅『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귀신론(鬼神論)』⋅『사육신전(死六臣傳)』 등이 있다. 당시 기휘(忌諱)에 속하였던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浮)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실을 『육신전(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남효온과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金時習)⋅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를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부르고,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충절과 대비하여, 살아서도 그 절의(節義)를 지키려고 죽을힘을 다한 생육신의 충절도 높이 평가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하는 바가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할 때 김종직이 남효온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秋江)’이라는 호(號)를 부를 만큼 존경해 주었다고 한다. 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가깝게 지냈다. 나이 27세 때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서 마지못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했으나, 그 뒤에 다시 과거장에 나가지 않았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세상의 도의를 바로 새우기 위해 과거장에 나가서 벼슬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남효온은 단종의 어머니 소릉(昭陵)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대답하였다. 당시 성종 시대에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릉을 복위하자는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큰 화(禍)를 부를 수도 있었다. 남효온은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견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말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산(毋岳山)에 올라가서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넋이 빠진 체 앉아 있었다.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의 이른바 ‘죽림거사(竹林居士)’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남효온은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이 거사를 일으켜서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계획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사실을 『육신전(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출간하는 것을 말렸지만, 남효온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충신의 명성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대장리(大壯里)의 언덕에 있는데, 정조 때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금릉집(金陵集)』 권16] 1513년(중종 8) 소릉(昭陵)의 복위가 이루어지자, 남효온도 신원(伸寃)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그때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내려 주었다.

부인윤씨(尹氏)는 군수(郡守)윤훈(尹壎)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아들 남충세(南忠世)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하여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이때 남효온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송집(澗松集)』
  • 『간이집(簡易集)』
  • 『갈암집(葛庵集)』
  • 『강재집(剛齋集)』
  • 『강한집(江漢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경산집(經山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고봉집(高峯集)』
  • 『관란유고(觀瀾遺稿)』
  • 『구정유고(龜亭遺藁)』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귀록집(歸鹿集)』
  • 『금곡집(錦谷集)』
  • 『금릉집(金陵集)』
  • 『금역당집(琴易堂集)』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언(記言)』
  • 『기재잡기(寄齋雜記)』
  • 『남명집(南冥集)』
  • 『노봉집(老峯集)』
  • 『뇌연집(雷淵集)』
  • 『단계유고(丹溪遺稿)』
  •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
  • 『대동기문(大東奇聞)』
  • 『대산집(大山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계집(桐溪集)』
  • 『동명집(東溟集)』
  • 『동문선(東文選)』
  • 『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상집(東湘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동토집(童土集)』
  • 『만구집(晩求集)』
  • 『망헌유고(忘軒遺稿)』
  • 『매월당집(梅月堂集)』
  • 『매천집(梅泉集)』
  • 『명곡집(明谷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모당집(慕堂集)』
  • 『모재집(慕齋集)』
  • 『목민심서(牧民心書)』
  • 『무명자집(無名子集)』
  • 『무주일고(無住逸稿)』
  • 『미산집(眉山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미암집(眉巖集)』
  • 『병계집(屛溪集)』
  • 『병와집(甁窩集)』
  •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부계기문(涪溪記聞)』
  • 『부상록(扶桑錄)』
  • 『사미헌집(四未軒集)』
  •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산당집(山堂集)』
  • 『삼탄집(三灘集)』
  • 『상촌고(象村稿)』
  • 『상촌잡록(象村雜錄)』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서원등록(書院謄錄)』
  • 『서포집(西浦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석동유고(石洞遺稿)』
  • 『석재고(碩齋稿)』
  • 『석주집(石洲集)』
  • 『성근보집(成謹甫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재집(性齋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재집(穌齋集)』
  • 『소총유고(篠䕺遺稿)』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송파집(松坡集)』
  • 『수헌집(睡軒集)』
  • 『순암집(順菴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암서집(巖棲集)』
  • 『야은일고(壄隱逸稿)』
  • 『약천집(藥泉集)』
  • 『어계집(漁溪集)』
  • 『여헌집(旅軒集)』
  • 『역대요람(歷代要覽)』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음유고(梧陰遺稿)』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서집(龍西集)』
  • 『용재유고(慵齋遺稿)』
  • 『용재집(容齋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우복집(愚伏集)』
  • 『운양집(雲養集)』
  • 『운창집(芸窓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월정집(月汀集)』
  •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이요정집(二樂亭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일두집(一蠧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조경일록(朝京日錄)』
  • 『조은집(釣隱集)』
  • 『존재집(存齋集)』
  • 『종묘의궤(宗廟儀軌)』
  • 『지봉유설(芝峯類說)』
  • 『지퇴당집(知退堂集)』
  • 『창석집(蒼石集)』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강냉화(秋江冷話)』
  • 『추강집(秋江集)』
  • 『탁영집(濯纓集)』
  • 『택당집(澤堂集)』
  • 『퇴계집(退溪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풍서집(豐墅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학봉집(鶴峯集)』
  • 『한강집(寒岡集)』
  • 『한포재집(寒圃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
  • 『허백당집(虛白堂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후계집(後溪集)』
  • 『후조당집(後彫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