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일기(事變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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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 승정원의 임시관직이었던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가 1723년(경종 3)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약 125년 간 일기체의 형식으로 매일의 근무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공무일기다.

개설

『사변일기(事變日記)』는 1723년부터 1848년까지 승정원의 사변가주서들이 사변, 국옥 등과 같은 사건들을 날짜순으로 기록한 일기이다. 이를 1929년 이왕직(李王職)에서 필사한 것이다. 변경 지방의 관리 실태와 당시 대외 관계를 살필 수 있으며, 칙사 영접에 관한 기록을 통해 칙사의 북경 출발 정보부터 시작해서, 원접사·접반사·반송사의 파견·영칙 거둥 등 중국 사신의 영접에 관한 전모도 파악할 수 있다.

편찬/발간 경위

『사변일기』는 승정원(承政院)의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들이 1723년(경종 3)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약 125년 간 매일의 사변, 국옥 등과 같은 사건들을 시기순으로 일기체의 형식을 통해 기록한 공무일기이다. 이를 1929년 이왕직에서 필사한 것이다.

가주서(假注書)는 승정원에서 근무하던 정7품의 주서 2명이 사고를 당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유고(有故) 상황일 때 임시적으로 정원 이외에 별도로 차출했던 임시관직이었다. 주로 비변사의 도움을 받아 기존 승정원 주서들이 담당했던 업무 일부를 맡아 처리하였다.

실제 정식 승정원 주서들이 제작했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제1책은 1723년(경종 3)의 일기, 제2책부터 31책까지는 1727년(영조 3)~1775년(영조 51)의 일기, 제32책부터 41책까지는 1777년(정조 1)~1799년(정조 23)의 일기, 제42책부터 58책까지는 1801년(순조 1)~1834년(순조 34)의 일기, 제59책부터 71책까지는 1835년(헌종 1)~1848년(헌종 14)의 일기이다.

서지 사항

불분권(不分卷) 7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36×27.6cm이고, 판심은 27x19.1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승정원의 사변가주서들이 기록한 일기다. 수록기간은 1727년(영조 3)에서 1848년(헌종 14)까지이며, 빠진 부분이 많다. 사변가주서는 정 7품 관직이며, 주로 비변사 관련업무와 국청(鞫廳)의 일을 맡아 보았다.

이 책을 『승정원일기』와 비교해 보면, 『승정원일기』의 내용 가운데 일부만 수록되어 있고, 사안에 따라서는 『승정원일기』에 실려 있지 않은 내용도 일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변가주서들이 자신에게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 기록하여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개 월단위로 편집되어 있으며 사변가주서와 승지(承旨)들의 성명이 앞머리에 기재되어 있고, 처리한 안건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책의 표지에는 신유년 정월에서 6월까지의 ‘국청일기(鞫廳日記)’라 쓰여 있고, 1741년(영조 17) 승정원에 올렸으며 신미년에 개장(改粧)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제목에는 국청일기라 하였으나, 국문관계 기록 뿐 아니라, 왜인 접제나 재해민 구휼 등 승정원 사변가주서의 담당업무 전반에 관한 기록이 함께 묶여져 있으므로 제목을 ‘사변일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국청일기』와 『사변일기』의 파본을 다시 편집하는 과정에서 착란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수록기간은 1741년에서 1787년(정조 11)까지이며 부분적으로 연대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 국문(鞫問) 기록 3건과 화재사건 조사기록 1건이 합철되어 있다. 내용은 주로 두만강·압록강 건너편 청인의 동향, 표류한 왜선을 구제하여 조사한 보고문과 각지의 어선 침몰, 화재, 호환, 지진 등에 의한 피해보고 및 구휼지시 등이다.

후반부에는 망궐례(望闕禮)와 시관택차(試官擇差), 정조의 가례 등 정조 때 정해진 규칙이나 행사, 전례 등을 주제별로 편집한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어떤 본의 표지에는 기사년 정월에서 12월까지의 ‘사변일기’라 쓰여 있고, 1749년(영조 25)에 승정원에 올렸으며, 을해년에 개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1724년(영조 즉위) 11월과 1730년(영조 6) 4월에서 6월까지의 기록이다. 1724년의 내용은 경종의 국장(國葬)과 산릉(山陵) 조성에 관한 것이며, 1730년의 기록은 이인좌의 난의 잔당과 결탁하여, 궁성에 침입하였다가 체포된 죄인 최필웅(崔必雄) 등에 대한 국문 내용 등이다.

규장각에는 71책의 『사변일기』가 있으며, 본서의 내용과 서로 중복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계속 작성되었던 『사변일기』의 일부가 보관 중 파손되어, 다시 편집하는 과정에서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주로 남해안 지방에서의 왜선, 왜관, 조왜미변선 등 일본에 대한 내용, 북방 변경에서의 청나라 관련 내용, 그 외 황당선의 출몰 등 당대 조선의 국경 관리 실태에 대한 내용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원접사, 접반사, 반송사 등 사신에 관련된 내용도 많아, 1700년대 초반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외교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1차 사료 중 하나다.

참고문헌

  • 김경록, 「『同文彙考』를 통한 조선후기 외교사안 연구-原編 ‘封典’ 事案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제32집, 명청사학회, 2009.
  • 유재춘, 「朝鮮後期 朝·日國書 硏究」, 『한일관계사연구』 제1집, 한일관계사학회, 1993.
  • 장혜진, 「17세기 중반 조선의 日光東照宮 인식-조선후기 외교사료를 중심으로-」, 『일본문화학보』 제36집, 한국일본문화학회, 2008.
  • 홍성덕, 「조선후기 한일외교체제와 대마도의 역할」, 『동북아역사논총』 제41호, 동북아역사재단,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