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녕전(咸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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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의 침전.

개설

함녕전은 1897년(광무 1)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이건해 만들었으며,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고종실록』 34년 6월 19일). 1904년(광무 8) 경운궁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으며, 1919년 이곳에서 고종이 승하하였다.

위치 및 용도

함녕전은 경효전(景孝殿: 현 덕홍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함녕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2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첫 번째 문이 광명문(光明門)이며 두 번째 문이 치중문(致中門)이다. 광명문은 팔작지붕에 대문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반면, 치중문은 평대문의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광명문의 서쪽에는 12칸의 장방형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남여고(藍輿庫)로서 일종의 가마를 보관하는 곳이다. 광명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동쪽의 영복당(永福堂)으로는 봉양문(鳳陽門)을 통해 출입하며, 서쪽의 경효전으로도 2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다.

함녕전 남쪽 행각에는 치중문 외에도 동쪽에 협강문(協康門)이라는 작은 대문이 만들어져 있다. 함녕전은 서쪽의 경효전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다른 삼면은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 행각에는 함녕전 오른편에 풍안당(豊安堂)이 있고, 풍안당 아래쪽에는 향복당(享福堂)이 있다. 풍안당이 위치한 곳에는 응춘문(凝春門)을 두어 영복당에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북행각에는 만희당(萬喜堂)이 있고 중간에 돈덕문(敦德門)을 두어 수인당(壽仁堂)에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서쪽 담장에도 3개의 문을 만들어 하나는 경효전, 2개는 함유재(咸有齋), 정관헌(靜觀軒)에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변천 및 현황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을 크게 중건하면서 고종이 처음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한 건물은 함녕전이 아니라 즉조당(卽祚堂)이었다. 당시에는 경운궁 내에 건축물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건물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경운궁을 기존의 궁과 버금가게 만들고 싶었던 고종의 뜻에 따라 곧바로 새 침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새롭게 만든 침전은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이건해서 조성했다. 『궁궐지(宮闕誌)』에 따르면, 만화당은 36칸의 크기이며 동쪽에 2칸의 복도가 있다고 했다. 동행각에는 남쪽에 응춘문(凝春門), 북쪽에 선양문(宣陽門)이 있고, 서행각에는 남쪽에 건추문(建秋門)과 북쪽에 가성문(嘉成門)이 있으며, 남행각에는 동쪽에 협강문(協康門)과 서쪽에 치중문(致中門)이 있고, 북행각에는 동쪽에 선가당(宣嘉堂), 서쪽에 향복당(享福堂)과 용성문(用成門)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경운궁으로 이건되었다고 하였다. 만화당을 옮겨 경운궁에서 어떤 건물이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여러 문과 건물명을 통해서 함녕전임을 알 수 있다. 1897년(광무 1) 윤용선(尹容善)을 함녕전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 김철희(金喆熙)를 서사관(書寫官)으로 임명하고 있어 이 시기에 함녕전 이건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34년 6월 19일). 만화당은 경복궁의 침전을 담당하던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화당을 옮겨서 만든 함녕전은 다른 궁의 침전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침전은 용마루를 만들지 않았는데, 용마루가 만들어졌고 전면에 월대도 만들지 않았다. 이때의 함녕전의 모습은 『[신축]진연의궤([辛丑]進宴儀軌)』「함녕전도」로 확인할 수 있다.

1904년(광무 8) 4월 14일 함녕전 구들을 고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화재는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번지면서 경운궁의 중요 건물을 대부분 태워 버렸다. 화재를 피해 고종은 경운궁 서쪽에 본궐과 떨어져 따로 마련된 곳으로 이어하였다. 이때 고종이 시어소로 사용한 건물은 수옥헌(漱玉軒: 중명전)이었다. 이후 경운궁 재건과 더불어 함녕전의 건축이 진행되었고, 1904년 12월 16일에 상량하였다. 여러 마감 공사가 진행되어 1905년(광무 9)에는 이미 함녕전 관련 공사가 모두 마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만들어진 함녕전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중건하면서 기존과 달라진 점은 함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행각을 담장으로 바꾸고, 평면형을 ㄴ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중건까지 하였지만 1905년에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1907년(융희 1) 7월 19일 황위를 순종에게 양위하는 등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 고종은 함녕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명전에 계속 머물렀다. 몇몇 행사가 함녕전에서 치러지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 고종이 함녕전에 돌아온 것은 1912년 10월 29일에 이르러서였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12년 9월 10일자에는 덕홍전(德弘殿)과 관련된 기사가 게재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창덕궁의 알현실과 마찬가지로 덕홍전을 알현실로 완공하여 6일부터 점등하였다고 한다. 즉 고종이 중명전에 머무르는 동안 공사가 진행된 것이다. 이 공사 결과 함녕전과 경효전 사이에 있던 담장은 철거되었고, 덕홍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었다. 현재도 덕홍전 동쪽에 서양식 판문이 있어 이곳과 함녕전이 과거에 복도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녕전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찬시실(贊侍室)과도 복도로 연결되었는데, 찬시는 이왕직(李王職)에 소속된 관리들을 칭한다.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도록 만든 기구이며, 궁내성(宮內省)의 관리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조선 총독이 관할하고 있었다. 고종을 곁에서 수발할 수 있도록 한다는 표면적 의미에 더해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고종의 감금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919년 1월 21일에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였으며, 다음 날 평소 생활하던 함녕전이 빈전과 혼전으로 정해졌다. 27일에는 묘호, 시호, 능호, 전호를 정했는데 묘호는 고종(高宗), 전호는 효덕(孝德)으로 정했다. 이로써 함녕전은 고종의 전호인 효덕전(孝德殿)이라는 현판을 달게 되었다. 그러던 중 1년제를 지내자마자 함녕전에 모셔졌던 고종의 우주를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고, 선정전이 효덕전이 되었다.

형태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평면을 기본형으로 하고 서북쪽에 4칸의 방을 부가해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갖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익공식 중에서 몰익공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신축]진연의궤([辛丑]進宴儀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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