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전(宋史筌)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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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사전 |
한글표제 | 송사전 |
한자표제 | 宋史筌 |
분야 | 역사서 |
유형 | 한문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정조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정조 |
간행처 | |
간행년일 | 1791 |
권책수 | 150권 61책 |
사용활자 | 필사본 |
표제 | 송사전(宋史筌) |
소장처 |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사전(宋史筌) |
이 책은 1791년(정조 15)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正祖)가 그의 문신들과 함께 편찬한 송(宋)나라의 역사서다.
개설
『송사전(宋史筌)』은 조선 제22대 군주인 정조와 그의 문신들에 의해, 완성된 『송사(宋史)』의 개찬서이다. 1279년 송나라의 멸망으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1780년(정조 4) 10월 10일 완성된 이 책은 중국의 정사(正史)를 중국이 아닌 타국에서 편수한 전무후무한 사서(史書)이기도 하다.
조선왕조 500년 간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학문인 주자학(朱子學)은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송대 유학이 조선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송대 유학의 발전과정과 계통성을 확인하는 것은 조선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송사』에는 ‘유림전(儒林傳)’뿐만 아니라, 이전에 없었던 ‘도학전(道學傳)’을 처음으로 편성해, 복잡한 유학의 학파들과 계통성을 정리하였다. 반면 『송사전』은 ‘유림전’과 ‘오현전(五賢傳)’으로 편성했는데, 입전 인물들이 『송사』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1780년대를 전후로 조선유학의 흐름 가운데 뚜렷한 특징은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實學)과 무관하지 않다. 유학사상이 단순한 이론적 관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외정세와 국내정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대안이 반영될 수 있는 사상적 변화를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편찬/발간 경위
1343년에 편찬된 『송사』는 일찍부터 정통론(正統論)의 관점에서 하자(瑕疵)가 지적되었고, 또 촉박한 편찬 기간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류와 중복 서술 때문에 중국의 역대 정사 중에서 가장 혹평을 받았던 역사서이다. 정조 역시 세손 시절 『송사』를 공부하면서, 그 체재와 내용에 많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정조는 직접 『송사』를 개수(改修)하기로 결심하고, 『송사』의 편목(編目)을 정리하고 필삭(筆削)을 가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즉위 전에 약 80권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즉위 후에 정조는 자신의 초고를 세손 시절의 측근 학자 10여 명에게 주어 개정하게 한 다음, 개정된 원고를 서명응(徐命膺)에게 주어 수정하도록 했다. 그 결과 1780년(정조 4)에 100권 40책의 『송사전』이 편찬됐지만, 정조는 그 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이덕무(李德懋, 1741~1793)에게 주어 다시 개정하도록 했다. 이덕무는 정조와의 긴밀한 협의 속에 수정 작업을 진행했고, 결국 1791년(정조 15)에 최종적으로 150권 61책의 『송사전』을 완성하였다.
서지 사항
150권 6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반엽광곽은 23.1×16.1cm이고, 10행 20자, 상흑어미(上黑魚尾)를 갖추고 있으며, 크기는 33×21.7cm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780년(정조 4년)에 조선왕조의 정조에 의해 편찬된 이 책은 중국 송나라의 실제적 역사경험들을 집약하고, 그 곳에 투영된 정치적 문화적 ‘감계(鑑戒)’를 찾아내고자 했던 결과물이었다. 이 책은 각각 본기(本紀) 8권, 세가(世家) 2권, 지(志) 47권, 열전(列傳) 91권, 의례(義例) 1권, 목록(目錄) 1권으로 총 15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글자수는 약 180만자에 이른다.
『송사』는 본기 47권, 지 162권, 표(表) 32권, 열전 255권으로 총 496권, 총 글자수는 약 500만자이다. 표면적인 통계수치로만 볼 때, 각 부문별 편차는 있지만, 『송사전』은 『송사』 전체의 약 28%에 해당하는 분량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송사전』은 『송사』의 단순한 ‘요약· 정리본’이 아니라, 『송사』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을 극복하는 동시에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송조(宋朝)의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했던 편찬의 목적이 있었다.
『송사전』의 ‘오행지(五行志)’는 『송사』의 ‘수(水), 화(火)’ 항목의 상(上)·하(下)의 분류방식을 ‘재(災)’와 ‘이(異’)로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송대에 가장 빈번하게 발생했던 수재(水災)와 화재(火災)를 이변현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기록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높였다. 『송사전』 ‘오행지’의 글자 수는 총 18,600여 자로 71,800여 자인 『송사』 ‘오행지’의 약 1/4 정도로 압축되었지만, 오히려 재해별 항목에서 재해의 횟수와 피해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송사』의 번잡함을 제거하였다.
한편 ‘오행지’의 기록은 단순한 자연재해의 기록이 아니라, 군주로 하여금 자신의 통치에 대해 자성하고 경계하기 위한 유교의 이념이 반영되었다. 한대(漢代) 동자서(董仲舒)의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은 재이(災異) 현상이 인간의 정치적 도덕적 행위와 밀접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이론으로 고대정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관념은 조선왕조 정조 시대에도 줄곧 지속되었고, 『송사전』이란 역사서 편찬에도 반영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정조가 초고를 직접 작성했고, 이후 개정 과정에서도 정조가 직접 원고를 검토하고, 재가했다는 점에서 본서는 정조의 사관(史觀)이 투영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문식, 「『송사전』에 나타난 이덕무의 역사인식」, 『동아시아문화연구』 제33호,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1999.
- 이성규, 「『송사전』의 편찬배경과 그 특색」, 『진단학보』 제49호, 진단학회, 1980.
- 최해별, 「『御定宋史筌』권8 「本紀·后妃」 체례개편의 목적」, 『지역사교육』 124권, 역사교육연구회, 2012.
- 홍승태, 「『宋史筌』「儒林傳」의 宋儒系統論」, 『한국사학사학보』 30권, 한국사학사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