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평전(報平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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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정무를 보던 건물.

개설

보평전은 고려말 공민왕 이후 나타난 왕이 업무 보는 건물로 일종의 편전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보평전에서 조준(趙浚) 등이 천거한 인재를 시험 보았으며, 정사를 결정할 일이 있을 때 신하들이 보평전에 불쑥 들어와 보고하니 무례하므로 앞으로 미리 고하고 여쭌 다음에 들어오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태조실록』 2년 6월 13일). 당시는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이므로 이때의 보평전은 개경의 궁궐에 있었으며, 위의 기사 내용을 통해 보평전이 편전의 기능을 가진 전각임을 알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창건 기사에는 ‘보평청’이라고 되어 있다. 그 배치는 다음과 같다. “연침(燕寢)은 동·서 소침과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남쪽에는 천랑이 있어서 보평청(報平廳)과 연결되었다. 보평청은 5칸으로 정사를 보는 곳이고 연침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칸씩이며, (중략) 이상이 내전(內殿)이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10월 7일에는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각 전각의 이름을 정하게 하였는데 연침은 강녕전(康寧殿), 보평청은 사정전(思政殿)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여기서의 보평청은 사정전의 이름을 짓기 이전에 일반명사로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보평청을 사정전이라고 이름 지은 후에는 몇 번 이를 보평전으로 칭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1405년(태종 5) 창덕궁을 짓고 여기에 편전과 보평청을 따로 지은 이후(『태종실록』 5년 10월 19일) 『조선왕조실록』에서 보평청이라는 단어는 창덕궁의 전각을 가리킬 때 사용되며 보평전은 경복궁의 사정전을 달리 칭한 말로 쓰였다. 이외에 보평전의 위치와 기능을 알려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로는 “근정전에 나아가 조회를 받고, 보평전으로 옮겨 나아가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갔다.”(『세종실록』 7년 4월 21일)고 하는 것이 있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의 보평전은 사정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세종대에 사정전을 다시 지으면서 강녕전과의 사이에 행각이 생기고 침전과 편전의 구역이 명확히 나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편전은 내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외전에 속하게 되었다.

형태

5칸에 이방(耳房)을 동서쪽에 각각 1칸씩 단 형태이다. 이방은 본 건물의 양옆에 부가된 것으로 편전과 연침에서만 보이는 형태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01년(태종 1) 태종이 보평전에서 정사를 보던 중 사관(史官)이 전 아래에 들어오니, 환관을 내보내는 일이 있었다. 태종은 보평전이 편안히 쉬는 곳이므로 사관이 반드시 들어올 곳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1418년(세종 즉위) 태종은 보평전에서 세종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다.

참고문헌

  • 김동욱, 「조선초기 창건 경복궁의 공간구성 -고려궁궐과의 관계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제7권 제2호, 1998.
  • 조재모, 「조선왕실의 정침 개념과 변동」,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제20권 제6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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