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당(紫薇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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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침전 동쪽에 있었던 소침.

개설

교태전(交泰殿) 동쪽에 위치한 자미당은 인지당(麟趾堂)과 같이 세종대에 소침으로 지은 전각이다. 조선전기에 인지당은 교태전을 중심으로 함원전(含元殿)과 대칭을 이루던 전각이었으며 자미당은 인지당 동편에 있었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자미당과 인지당은 교태전과 자경전 사이에 남북으로 두었으며, 고종이 경복궁에 임어했던 1868년(고종 5)~1873년(고종 10) 사이에 주로 자미당과 인지당, 자경전(慈慶殿)에서 진강을 하고 신하를 만났다.

위치 및 용도

자미원(紫薇垣)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있는 성좌로서 천제(天帝)가 거처하는 곳이라 하여 천자의 대궐을 뜻하기도 한다. 조선전기에 세종이 거처했으며 예종이 이곳에서 승하했다. 고종대 중건 이후에는 고종이 제왕 수업을 하던 1873년까지 소대와 진강을 하는 전각으로 사용했다.

인지당은 조선전기의 경복궁에서 함원전과 대칭으로 교태전 동쪽에 있었다. 세조대에는 어제시문(御製詩文)을 동쪽 별실에 봉안하고 규장각(奎章閣)이라 하였다(『세조실록』 9년 5월 30일).

변천 및 현황

자미당은 고종대에 창경궁의 자경전을 옮겨서 중건한 것이다. 고종대에 인지당은 교태전을 중심으로 함원전과 대칭이 되도록 교태전에 가깝게 중건되었으나, 1875년(고종 12) 내전 일곽의 다른 전각을 재건할 때 위치를 동쪽으로 약간 옮겨서 다시 지었다. 1876년(고종 13)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 재건했다(『고종실록』 25년 4월 12일).

형태

자미당은 자경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서쪽에 누마루인 집하루(集華樓)가 돌출되어 있다. 자미당의 남행각문으로는 봉륜문(鳳綸門)과 녹화문(錄華門), 자지문(自至門)이 있다. 처음 자미당을 지을 때 있었던 문 이름과 당호 중에 남행각의 규루문(虬漏門)과 동행각의 함향문(含香門)은 「북궐도형(北闕圖形)」에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두 차례의 재건 과정에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미당 북행각에는 유하문(流霞門), 흥춘당(興春堂), 기춘당(綺春堂), 서로문(瑞露門)이 있고 서행각에는 화대문(花對門), 헌길당(獻吉堂)이 있으며 서행각 남쪽에 교태전으로 통하는 월문 연휘문(延輝門)이 있다.

인지당은 「북궐도형」에 의하면, 행각으로 형성된 부지의 동편에 치우쳐 있고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정면 칸수가 짝수로 되어 있다. 남행각에는 정문인 가서문(嘉瑞門)과 휴응문(睢應門), 송인당(頌仁堂)이 있고 동행각에는 인후문(仁厚門), 찬인당(贊仁堂), 회선당(會善堂)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자미당은 세종이 지어서 자주 머물던 전각이었는지, 단종이 자미당의 난간을 보면서 세종을 그리워했다고 한다(『단종실록』 2년 11월 2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궁궐지(宮闕誌)』「북궐도형(北闕圖形)」
  • 김세은, 「高宗初期(1864~1873)의 經筵」, 『진단학보』89집,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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