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학(女眞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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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학 중 하나인 여진어.

내용 및 특징

역과(譯科)에는 한어(漢語)·몽어(蒙語)·왜어(倭語)·여진어(女眞語) 4개 전공이 있었다. 여진어는 1667년(현종 8)에 청어(淸語)로 개칭되었다. 역학(譯學) 중에는 한어가 가장 중시되었다. 조선에서는 대명외교의 중요성 때문에 건국 직후인 1393년(태조 2)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고 한학 교육을 실시하였다(『태조실록』 2년 9월 19일). 역학이 1393년(태조 2)에 설치된 6학, 즉 병학(兵學)·율학(律學)·자학(字學)·역학·의학(醫學)·산학(算學)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여진학도 한학과 함께 국초부터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문종실록』 1년 4월 7일).

여진학(女眞學)은 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과 함께 조선시대 역학 중의 하나였다. 역학 행정 및 역학 교육의 중추 기관으로 경관직 정3품아문인 사역원을 설치하고 역원(譯員)들을 양성하였다. 사역원에는 여진학[청학(淸學)] 생도 20명을 두었으며, 지방관서로 북청(北靑)에 10명, 의주(義州)·창성(昌城)·이산(理山)·벽동(碧潼)·만포(滿浦)·위원(渭源)에 각 5명씩 모두 60명을 두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1년에 6명씩 세공(歲貢)하게 하였다.

역과초시 합격자 정원을 전공별로 보면 한학이 23명으로 가장 많고, 여진학은 몽학·왜학과 함께 각 4명이었다. 한학과 달리 향시(鄕試)가 실시되지 않았다. 최종 시험인 복시의 합격자 정원은 한학 13명, 여진학은 몽학·왜학과 함께 각 2명을 선발하였다. 식년시와 증광시 선발 인원이 동일하였으며 대증광시는 한학·몽학·왜학·청학에서 각 2명을 더 선발하였다.

시험 방법은 한학과 달리 강서(講書)하는 시험 없이 사자(寫字)와 역어(譯語)시험이 있었다. 사자는 글씨를 베껴 쓰는 것을 말하는데, 외국어시험에서는 원어문자(原語文字)를 베껴 쓰는 시험을 보았다. 사자시험 과목은 『천자(千字)』·『천병서(天兵書)』·『소아론(小兒論)』·『삼세아(三歲兒)』·『자시위(自侍衛)』·『팔세아(八歲兒)』·『거화(去化)』·『칠세아(七歲兒)』·『구난(仇難)』·『십이제국(十二諸國)』·『귀수(貴愁)』·『오자(吳子)』·『손자(孫子)』·『태공(太公)』·『상서(尙書)』 등이었다. 이들 교재를 베껴 쓰는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역어시험으로는 『경국대전』을 번역하였다. 식년시와 증광시의 시험 과목이 동일하였다.

변천

청학은 병자호란을 계기로 비중이 커졌으며, 1667년(현종 8)에 여진학을 청학(淸學)으로 개칭하였다. 청나라는 건국한 뒤에도 만주인과 한인을 병용하고, 한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요긴한 말을 할 때는 청어를 사용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청학을 중요하게 여겼다. 1765년(영조 41)에는 청학을 몽학 앞에 위치시킴으로써 청학을 한학 다음으로 중시하였다. 그리고 『속대전』에서 시험 과목을 『팔세아』·『소아론』·『노걸대』·『삼역총해』로 하고 나머지는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역과방목(譯科榜目)』
  • 강신항, 『한국의 역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 송기중, 「『경국대전』에 보이는 역학서 서명에 대하여」, 『국어학』 14, 1985.
  • 원영환, 「조선시대의 사역원제도」, 『남계조좌호박사 화갑기념사학논총』, 1977.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13-1, 2014.
  • 이성무,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 『혜암유홍열박사 화갑기념논총』,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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