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사(梁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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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사위전을 지급받았던, 함경도 반룡산의 사찰.

개설

양천사(梁泉寺)라는 절 이름은 샘물과 함께 곡식이 솟아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753년(신라 경덕왕 12)에 창건되고 1636년(인조 14)에 중창되었다고 하지만 관련 문헌이 없어서 자세하지 않다. 인조반정 이후 대동청(大同廳)에 속해 있던 양천사의 사위전(寺位田)을 내수사(內需司)에서 탈취함으로써 두 기관이 대립하였다. 현재 북한에서 가장 큰 사찰 누각이 있으며 국보문화유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양천사의 사찰명은 절 뒤의 돌샘에서 샘물과 함께 조[粟]가 흘러나와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즉 ‘양(梁)’은 곡식을 의미하는 ‘량(糧)’과 발음이 같으므로 곡식[糧]이 샘물[泉]과 함께 흘러나온 절이라는 의미가 된다.

양천사는 753년(신라 경덕왕 12)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전하는 문헌이 없어서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1636년(인조 14)에 중창되었다고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인조가 1623년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양천사의 위전(位田)을 대동청(大同廳)에 소속시켜 민역(民役)에 충당하도록 하였는데, 1664년(현종 5)에 내수사(內需司)에서 양천사의 위전에서 나오는 곡식을 가져갔다고 하였다(『현종실록』 5년 10월 19일). 즉 양천사의 사위전(寺位田)에서 나오는 곡식을 두고 대동청과 내수사가 대립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위전이란 국가에서 사찰에 내린 토지로서, 조선전기에 대부분의 사위전을 국가가 몰수하였는데 당시까지 사찰 소유의 사위전이 있었다는 것은 양천사의 사격(寺格)이 높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1760년(영조 36)에는 양천사 승려 간상(簡相)이 평민 전덕수(田德守)의 아내를 강간하려다가 실패하자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전덕수의 아내를 위해서는 정표(旌表)가 세워지고 간상은 처단되었다(『영조실록』 36년 11월 19일).

일제강점기에는 함경도 석왕사(釋王寺)의 말사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 화재로 사찰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나, 북한은 양천사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건물을 복구하고 국보문화유물 제113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세워진 대웅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으로 위치에 따라 여러 형식을 취하였다. 대웅전 내부에는 불단 위에 ‘아(亞)’자 형의 닫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천장 중앙은 소란천장이고 그 주변은 빗천장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빗천장의 중간에는 연꽃봉오리 조각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만세루는 1729년(영조 5)에 중건되었으며,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사찰 누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지형을 이용하여 전면은 2층으로, 후면은 단층으로 만들어졌으며, 앞면 5칸, 옆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외에도 양천사 입구에는 미륵석상이 세워져 있고, 절 주변에는 여러 기의 부도가 있다.

참고문헌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 『북한의 전통 사찰』, 양사재, 2011.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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