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명소(錄名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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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도전할 자격을 인정받아 과거 응시를 등록하는 곳.

개설

과거 응시자가 과거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녹명소(錄名所)에 가서 등록을 해야 했다. 당사자는 물론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 사조(四祖)를 검사하여 친가·외가에 흠결이 없는지 확인하고 과거응시에 하자가 없어야 녹명할 수 있었다(『중종실록』 32년 8월 2일). 이러한 절차를 두는 까닭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는 자가 과거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태종실록』 17년 2월 23일). 이는 매우 까다롭게 진행된 절차로서, 세종조에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던 조말생의 아들이 문과 한성시에 합격하고 회시를 치르기 전 녹명하기 위하여 성균정록소(成均正錄所)로 갔으나 조말생의 죄상 여부를 의논한다는 이유로 녹명해 주지 않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녹명해 준 적이 있을 정도였다(『세종실록』 20년 3월 25일).

담당 관서는 식년 대소과 초시인 경우, 성균관시는 성균관에서, 한성시는 한성부와 예문관·성균관·승문원·교서관 사관(四館)의 7품 이하관 각 한 명씩이,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지정한 관리가 녹명을 담당하였다. 식년 대과 회시인 경우 사관(四館)이 주관하는 전례강(典禮講)을 통과해야 녹명이 가능하였으며, 식년 소과의 경우에도 사학(四學)이 주관하여 초시 전 시행하는 조흘강(照訖講)과 회시 전 시행하는 학례강(學禮講)을 통과해야 했다.

만일 녹명을 하지 않고 함부로 과거장에 난입한 자는 변방에 충군(充軍)되거나 수군으로 강정(降定)되었다. 이는 무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녹명 과정에서 의혹할 만한 일이 발각되면 관련된 관원 모두 파직당하고 당사자는 수군에 충정(充定)되었다.

내용 및 특징

녹명을 하려면 우선 과거 응시 금지자가 아니라야 하고, 과거에 응시할 만한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과거 응시 금지자는 부정부패 공직자의 아들, 영구적으로 관리가 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 재가실행녀의 아들·손자, 서얼의 아들·손자 등 이외에도 상중(喪中)에 있는 유생이나(『태종실록』 1년 3월 12일) 정거(停擧) 처분을 받은 유생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과거 응시 금지자가 아니라고 해서 모두 녹명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생원·진사나 일정한 연령 이상이 아니라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성실히 학업 수행에 매진하여 해당 학교에서 관청을 거쳐 과거 시험장으로 제출하는 응시자 명단인 부거유생도목(赴擧儒生都目)에 올라 있어야 했다.

학교에 재적하고 있으면서 평소 성실히 학업을 수행해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원칙은 조선조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학정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모범』(1582년)과 『학교사목』(1582년)에 종합적으로 정리되었다. 학교에 소속되는 것을 기피하거나 학업 수행에 불성실한 자는 물론,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도 도태시켜 군적에 편입시키고 과거에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등 성실하고 올곧은 성품을 갖추는 것이 강경·제술의 역량을 겨루는 시험에 참여하는 데에 전제 조건이라는 원칙을 상세히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과실이 있음에도 기어이 고치지 않아 학적에서 삭제된 자는 전국의 학당에 통고되었다.

『학교모범』에 따르면, 학적자 명부와 평소의 행실을 기록한 선적(善籍)·악적(惡籍)을 놓고 관원과 장의(掌議)·유사(有司) 등 유생 대표들이 협의하여 오점이 없는 자를 가려 과거 응시자 명단을 작성하였으며, 학적을 보유하지 않아도 되는 생원·진사일지라도 거주지의 공론이 과거 응시에 하자가 있다고 지목하는 인물은 그 명단을 각 도 관찰사가 취합하여 성균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학교에 재적하고 있는 유생은 평소 학교에서 시행하는 강회(講會)에 성실히 참석해야 하며, 사유 없이 불참을 거듭하거나 낙제를 반복하면 제적되거나 일정기간 응시 자격을 박탈하는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 단, 일정 연령 이상자는 강회의 시행 기록인 강안(講案)에 올라 있지 않더라도 부거도목(赴擧都目)에 들 수 있었다.

과거 응시자 명단에 들기 위해서는 일정 연령 이전에는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성실히 강학 활동에 참여하여 일정 수준의 실력을 입증해야 하고 바른 인품을 갖추고 있는지 학교 안팎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했다. 즉, 덕성의 문제는 이미 학업을 수행하는 동안에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고, 과거 시험장에서는 의심할 바 없는 덕성의 응시자들로 하여금 경전에 대한 이해와 문장 실력을 겨루게 하여 탁월성을 입증한 인물을 발탁하겠다는 것이었다.

경박하고 불성실한 무리들은 재학(才學)이 출중하더라도 과거에 나아갈 수 없도록 하였는데 이는 국초부터 강조된 지향성이며(『태종실록』 4년 8월 20일), 작성된 과거 응시자 명단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관련자 모두 처벌받았다(『세종실록』 26년 2월 4일).

변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재학하고 있어야 한다는 요건은 새 왕조의 개창을 알리는 조서에 명기되어 있을 정도로 기본적이고도 상식적인 대원칙이었다. 즉, 고려조의 양성 및 선발제도에 바탕을 이루는 좌주문생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중앙의 태학과 지방의 향교 생도를 확충·배양하고 그중에 탁월한 인물을 선발하여 등용한다는 것이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이는 서울과 지방의 하부 단위에서 차차 선발하여 태학에 들이고, 여기에 속한 인물 중에서 문과 급제자를 가리도록 하는 방식을 지향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태종조 초에 나온 사간원의 논의에서 이런 지향성을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태종실록』 4년 8월 20일).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성권우 등이 마련한 학교제도·인재 선발에 대한 규정에서도 관리의 자제는 물론 서민의 자제 역시 학교에 들이고 실력을 갖춘 15세 이상의 생도들 중에서 선발하여 생원시에 나아가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3년 6월 30일).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유생인 사자독서인(私自讀書人)이라고 하더라도 한성의 경우 부학(部學)과 지방은 교관·학장으로부터 경학 공부와 제술 실적을 점검받아야 하고, 지방인 경우에는 해당 지역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과거 시험장으로 이첩하도록 한 다음 과거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6년 2월 4일). 이들은 일정 연령 이상의 나이가 많은 유생들로서, 비록 학교에 나아가 함께 공부하지는 않더라도 본인의 경학·제술 실력을 입증할 활동을 학교와 관련하여 지속하고 있거나 이전에라도 한 적이 있어야 했다.

불시에 치르는 시험인 경우 강학에 참여한 횟수가 많아야만 응시를 허락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유생으로서 학적을 보유하면서 평소 강학에 힘쓰는 것은 과거를 응시하기 위한 요건이었다(『중종실록』 29년 11월 9일).

학적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에 도달한 유생에 대해서만 과거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법제를 더욱 분명히 하여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명종조에 마련된 『과거사목』(1553년)과 『상정과거규식』(1557년)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예컨대 소과에 처음으로 도전하려는 유생의 경우, 그는 학교에 적을 두고 있어야 하고 중앙에서는 예조, 지방에서는 감영을 거쳐 『소학』 구술시험인 조흘강 강소(講所)에 송부된 명단에 들어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으며, 예조와 각 도에 보고된 조흘강 통과자 명단과 각 유생이 소지한 조흘첩을 대조 확인한 다음에야 녹명하여 과거 시험장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절차는 과거제도가 새로운 고시제도로 대변통되는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과거사목(科擧事目)』
  • 『상정과거규식(詳定科擧規式)』
  •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 김경용, 「조선중기 과거제도 정비과정과 그 교육적 의의」, 『교육사학연구』 제20집 1호, 한국교육사학회, 2010.
  • 김경용, 「조선조의 과거제도와 교육제도」, 『대동한문학』 제40집, 대동한문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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