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록(李綏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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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4년(명종 19)∼1620년(광해군 12) = 57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상주 목사(尙州牧使)·홍문관 응교(應敎)이고, 증직(贈職)은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字)는 수지(綏之)이고, 호(號)는 동고(東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경기 양근(楊根) 출신으로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봉상시(奉常寺) 첨정(僉正)이극강(李克綱)이고, 어머니 온양정씨(溫陽鄭氏)는 정숙(鄭琡)의 딸이다. 밀성군(密城君: 세종의 서출 제 5왕자)의 5대손이고, 영의정(領議政)이경여(李敬輿)의 아버지다.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 수몽(守夢)정엽(鄭曄)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 서산의 백성들 가운데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굶주리는 자가 많았는데, 서산 군수이수록이 고을의 창고를 열어 기민(饑民)들을 구제하였다. 선조 말년에 서북면(西北面)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고향 경기 양근(楊根)에 은거하였다. 그 후, 여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 다음해인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보임(補任)되었으나, 포의(布衣)의 선비처럼 열심히 책을 읽으며, 벼슬에 진출할 뜻이 별로 없었다.[행장] 1588년(선조 21) 아버지 이극강(李克綱)이 세상을 떠나자 선영(先塋)에서 형제들과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90년(선조 23) 상기(喪期)를 마친 후, 홍문관 정자(正字)·저작(著作)을 거쳐,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었다. 사론(士論)에서는 “이수록을 사관(史官)으로 뽑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를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비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깊은 산골로 피난해 들어가, 몸소 먹을거리를 구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593년 (선조 26)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어가(御駕)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온 후, 비로소 승륙(陞六)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곧 이어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수록을 청요직(淸要職)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였으므로 충청도 서산 군수(瑞山郡守)가 되었다. 이때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굶주리는 자가 많았으므로, 고을의 창고를 열어 기민(饑民)을 진휼(賑恤)하는 한편, 둔전(屯田)을 넓게 설치하였는데 가을에 풍작을 거두면서 공사(公私)간의 곡식 걱정을 해결하였다. 다음해에 그가 고을을 떠나자, 백성들이 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1598년(선조 31) 평안도 곽산 군수(郭山郡守)가 되었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어 왜란 이후의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켰다. 평안도 감사가 그의 치적이 가장 우수하다고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이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비문]

1600년(선조 33)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는데,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01년(선조 34)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그 무렵 좌의정이원익(李元翼)이 서북면(西北面) 체찰사(體察使)가 되면서, 이수록이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정홍익(鄭弘翼)과 함께 체찰사를 도와 많은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였다.이때 평안도 감사가 이수록의 일가친척이라는 핑계로 술을 보내고 문안하려고 하였으나, 이수록은 술을 돌려보내고 편지를 보내 나무랐는데, 그 뒤로는 감사가 감히 사적(私的)인 일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들은 체찰사이원익은 “내가 이수록을 막료(幕僚)로 두었기 때문에 막부(幕府: 체찰사 관부)가 존엄을 얻었다.”면서 기뻐하였다.[비문] 1602년(선조 35)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대사헌이 되자, 서인(西人)을 공격하여 그 중진들을 모두 축출시켰는데, 이때 이수록도 대동도(大同道) 찰방(察訪)으로 쫓겨났다. 이에 그는 얼마 후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1603년(선조 36) 내자시 정(內資寺正)이 되었다가,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로 전임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황해도 봉산 군수(鳳山郡守)가 되었다가, 1606년(선조 39) 경상도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상주(尙州)는 지역이 넓고 소송이 번다(繁多)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었으나, 한결같이 청렴하고 간편하게 다스렸을 뿐 아니라, 여가에는 고을의 자제(子弟)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깨워주니, 온 고을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1608년(선조 41)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영의정이원익의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다시 승문원 판교(判校)를 거쳐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행장]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된 후, 1610년(광해군 2) 사명(使命)을 받고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 옥사(獄事)를 조사하였는데, 합천(陜川) 사람 문지(文贄)가 그의 형 문신(文賮)이 아버지의 첩과 간통하였다고 고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형이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우로서 형을 고발한 것도 윤리 강상에 관계되는 중대한 죄였으므로, 조정에서 이 사건을 중대한 옥사로 간주하여, 그를 합천으로 보냈다.(『광해군일기』 2년 1월 23일) 이수록은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조사하고 조목조목 진술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합천에 있던 이수록은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이 되어, 상소를 올려 휴가를 청하였다. 그러나 회보(回報)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길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다가, 1612년(광해군 4) 강원도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갔다.[행장]

1613년(광해군 5)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일당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그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을 처형하자, 벼슬에 뜻을 잃은 이수록은 벼슬에 임명되면 즉시 사임하였으므로, 한 자리에 오래도록 재임한 적이 없었다. 1614년(광해군 6)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1615년(광해군 7) 다시 상의원 정(尙衣院正)이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승문원 판교(判校)가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다시 상의원 정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1617년(광해군 9) 다시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승문원 판교(判校)가 되었다. 광해군 초기에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정권을 잡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감싸고돌던 서인(西人)을 탄압하였는데, 이이첨의 세도(世道)를 쉽게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이수록은 거짓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시키려고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고, 백관들에게 대궐 뜰[庭]에 들어와 광해군에게 대비의 폐출을 청원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자, 그는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양근(楊根)의 강가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이때 이수록은 친구인 수몽(守夢)정엽(鄭曄)과 함께 완평군(完平君)이원익(李元翼)을 모시고 전국의 산수(山水)를 찾아다니며 유람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다시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기용(起用)되고 품계가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랐으나,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 이후 반년 동안 투병하다가, 그해 8월에 돌아가니, 향년 57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겉으로는 온화하였나, 속마음은 강직하였다.[행장]

이수록(李綏祿)은 상대편이 좋은 사람인 경우에는 자기의 마음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으나, 나쁜 사람이면 비록 그 상대가 권귀(權貴)라고 하더라도 면전에서 배척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배척을 당한 상대방이 낯이 빨개져서 기어가듯이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수록은 부모의 기일(忌日)이 되면 거친 베옷으로 갈아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울먹이며 슬퍼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무엇이든 집에 있는 물품을 남에게 나누어주었다. 간혹 이수록의 자제들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 어렵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기라도 하면 그는 “우리들은 마땅히 어머니의 뜻을 힘껏 받들고 따라야 한다. 어머니의 뜻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비문]

이수록은 벼슬을 맡아 직무를 수행할 때, 언제나 나라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하는 것만을 생각하였다. 경연(經筵)에 있을 때에는 옛날 제도를 고찰해서 정책을 개발(開發)하고 임금을 이끌어 강관(講官)으로서의 체통을 지켰으며, 대간(臺諫)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지론(持論)이 확고하여 줏대 없이 남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어떤 간사한 관리가 당로자(當路者)에게 빌붙어 이조 좌랑(吏曹左郞)이 되었는데, 언관(言官)들 조차 그 세력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는 주발(周鉢: 놋쇠로 만든 좋은 그릇)에 개똥을 담은 셈이다.” 라고 탄식하며 즉시 그 관리를 탄핵하여 내쫓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 또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는 어떤 탐욕스러운 수령이 있었는데, 이수록이 그 수령을 탄핵하려고 하자, 그의 동료가 “자네는 이 사람이 아무개 재상의 가까운 친족인 줄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이목(耳目)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대간(臺諫)이라고 생각한 이수록은 정색을 하며, “자네는 임금의 눈과 귀를 집정자의 사인(私人)으로 가리려고 하는가.” 라고 하자, 말문이 막힌 그 동료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대북(大北)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은 바로 이수록(李綏祿)의 4촌 매부였다. 그는 자기 패거리를 늘이기 위하여 늘 장래성이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였는데, 이수록에 대해서도 언제나 달콤한 말로 유혹하였으나 그는 일체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이첨이 이수록에게 “술 마시는 것을 조금 절제하시게. 조정의 분위기를 살펴보더라도, 이제는 나에게 머리를 돌리는 것이 좋지 않겠소.”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이첨은 이 편지에서 겉으로는 술을 경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수록을 자기편으로 유혹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수록은 “천 가마니의 녹봉(祿俸)도 한 잔의 술잔과 맞바꾸지 못하는데, 하물며 눈에도 차지 않을 복록(福祿)을 가지고 어찌 세상에 넘치는 앙화(殃禍)를 당하라는 말이오. 공은 나를 걱정하지 마시오. 나야말로 공이 걱정되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바를 따를 뿐인데, 아마 내가 공에게 머리를 돌릴 날은 결코 없을 것이오.”라고 답신을 보냈다. 이 편지를 본 권신 이이첨이 당장 이수록을 해치지는 않았으나, 언젠가 해코지하려고 앙심을 품었다.

이수록의 인척(姻戚)이 되는 한찬남(韓纘男)은 결국 이이첨의 유혹에 넘어가 한 패거리가 되었다. 이에 이수록은 한찬남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어떤 친척의 혼인(婚姻) 잔치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이수록이 술을 얼큰하게 마신 뒤, 비틀거리다가 머리에 쓴 모자(帽子)가 비뚤어졌는데, 한찬남이 이수록의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여보게, 자네의 모자가 머리에서 떨어질까 위태로워 보이네.” 하고 말하자, 이수록이 껄껄 웃으면서 “내 눈에는 아저씨의 머리가 떨어질까 매우 위태로워 보이니, 더욱 조심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찬남은 움찔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얼마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한찬남은 간신 이이첨과 함께 훈련원 앞에서 참형을 당했는데, 그 머리가 땅에 떨어져 길거리에 나뒹굴었다.

광해군 시대에 이수록과 교유하던 사람들은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고 모두 아주 위태롭게 여겼는데, 이수록이 끝까지 화(禍)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술에 의탁(依托)하여 술주정꾼처럼 행동하면서 스스로 자기 능력을 잘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수록의 행동들이 정말 술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미친 척하는 행동도 아무나 쉽게 따라하지 못할 만큼 뛰어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수록은 평소에 술을 좋아하였으나, 그의 만년(晩年)인 광해군 시대에는 지나칠 정도로 술을 마시면서 시대를 잘못 만난 자신의 처지를 서글퍼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술주정꾼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는 대문을 닫아걸고 눈물을 흘렸으며, 간혹 혼자 정처 없이 길을 떠나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손수 제갈공명(諸葛孔明: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을 써서 방안에 걸어두고, 날마다 잠자고 일어나면 소리 내어 읽었는데, 읽고 나면 목이 메도록 흐느껴 울면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비문]

자제들이 간혹 이수록에게 술을 좀 적게 들라고 넌지시 권하면, 그는 “너희들의 말도 옳기는 하다. 그러나 옛 사람 가운데에는 모래주머니를 껴안고 물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정말 종묘와 사직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은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하물며 내가 술을 마시고 세상 근심걱정을 잊어보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무슨 흠을 잡겠느냐.”라고 하였다. 이후, 여러 달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술만 마시다가, 병이 위독해졌으나 약(藥)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수록은 맏아들 이경여의 손을 잡고 “올바르게 살다가 죽으므로, 나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것이다. 다만 너희들은 훗날에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될 것인데, 구차하게 죄를 면하여 조상들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라며 영결(永訣)을 고하고 마침내 눈을 감았다.[비문]

이수록(李綏祿)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함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나이 7, 8세가 되던 무렵에는 남들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단숨에 그 글을 암기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아주 신통하게 여겼다. 조금 자란 뒤에는 문사(文辭)가 나날이 발전하여, 문명(文名)을 더욱 크게 떨쳤다. 그는 어린 나이에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뽑혔으며 풍채가 남들보다 뛰어나, 출입할 때 서너 명의 친구들을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으므로, 모두 장차 이수록이 크게 영달(榮達)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비문] 약관(弱冠)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후, 관계(官界)에 진출하여 그가 교제한 사람들이 모두 한 시대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에 같은 또래의 친구들은 모두 공경(公卿) 대부의 지위에 올랐으나, 오직 이수록만은 술 때문에 관직에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으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기색이나 언사(言辭)에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아들 이경여(李敬輿)가 마침내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이 되면서, 아버지의 여한을 풀어주었다.[비문]

이수록은 평생 동안 특별한 기호(嗜好)가 없었는데, 성색(聲色)이나 재화(財貨)는 물론, 바둑·장기를 두며 친구들과 소일하는 일이나 화려하게 집안을 꾸미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벼슬에서 파면되었을 때에는 처자(妻子)들이 경제적인 곤란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집에 있을 때에는 누추한 방에서 잠을 자고 거친 음식을 먹었으며, 밖으로 나갈 때에는 해진 안장을 걸친 말라빠진 조랑말을 타고 다니고, 헌 갓을 쓰고 낡은 베옷을 입고 다녔다. 이수록의 문장(文章)은 자연스럽게 써내려간 것이 많은데, 평상시에 문장을 가다듬지 않았으며, 뜻을 세우고 붓을 휘두르면 마치 드넓은 바다처럼 출렁이어, 크기가 광범위하면서도 격조(格調)가 창연(蒼然)하였다. 선조 시대 많은 문사(文士)들이 배출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시문(詩文)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이수록의 글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수록은 문학(文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정사(政事)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가 단지 현량(賢良)한 목민관(牧民官)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정말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점을 아쉽게 여겼다. 이수록이 지은 시문(詩文)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실화(失火)하는 바람에 모두 소실되어,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근군(楊根郡) 백운봉(白雲峰) 아래 언덕에 있는데,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비문] 죽은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는데, 아들 이경여(李敬輿)가 영의정(領議政)이 되면서, 조상 3대(代)가 추증(追贈)을 받은 것이다.[비문] 아들 이경여(李敬輿)가 지은 이수록(李綏祿)의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백강집』 15권]

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는 선전관(宣傳官)송제신(宋濟臣)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이경여(李敬輿)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차남 이정여(李正輿)는 재주가 있어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장녀는 요절(夭折)하였고, 차녀는 현감(縣監)한무(韓楙)에게 시집갔다.[비문] 맏손자 이민장(李敏章)은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지냈고, 둘째손자 이민적(李敏迪)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비문]

부인 송씨(宋氏)는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으므로,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따라 시부모를 섬기고 시집 식구들을 건사하였다. 시아버지 이극강의 형제자매들이 여덟 명이나 되고, 그 아래 남녀 조카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으나. 부인 송씨는 그들을 각기 그에 맞는 도리로 대하였으므로, 온 집안사람들이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문중(門中) 사람들이 부인 송씨를 ‘부덕(婦德)의 본보기’로 추중(推重)하였다. 그러나 부인 송씨는 자녀들을 가르칠 때 몹시 엄격하여, 혹시 잘못을 저지르거나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준엄하게 나무라고 그냥 용서해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 송씨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두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맏아들 이경여(李敬輿)는 마침내 영의정(領議政)에 오를 수 있었으나, 몸이 약한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으므로, 어머니 송씨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만들었다.

부인 송씨는 친정이 부잣집이었으나, 시집은 시아버지가 재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본래 가난하였고, 남편 이수록이 술을 좋아하여 재산을 거의 탕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부인 송씨는 몸소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절약하고, 부지런히 길쌈이나 바느질을 하여, 살림살이에 보태었다. 남편 이수록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 부인 송씨가 항상 술과 음식 등을 마련하여 손님을 잘 대접하였다. 또한 시부모는 안팎으로 어려운 친척들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집안의 물품을 나누어 주었으나, 부인 송씨는 시부모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그 뜻을 잘 받들었다. 부인 송씨가 주안상을 차리고 집안의 생필품을 마련하느라 온 힘을 기울였으나, 남편 이수록과 시부모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남편 이수록이 죽은 뒤에 두 번이나 호란(胡亂)을 당하였는데, 맏아들 이경여가 인조를 호종(扈從)하기 위하여 떠나려고 어머니 송씨에게 하직할 때, 이경여는 허둥지둥 하면서 차마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때 어머니 송씨는 맏아들에게 “네가 이미 벼슬길에 나서서 임금을 섬기고 있는데, 난리를 당하여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면 의롭지 못하다. 미천한 어미 걱정일랑 하지 말고 어서 길을 떠나라.”라고 하며 독려하였다. 이경여가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어머니 송씨는 이미 충청도 청주(淸州)의 친정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모자(母子)가 서로 만날 때마다 송씨는 반드시 아들 이경여에게 “너는 네 아버지가 관직에 있을 때에 경비를 줄이고 절약하기에 힘쓰신 것을 잊지 말고, 이 어미 때문에 한 고을의 원망을 초래하지 말아라.”라고 경계하였다.

그 뒤에 휴가를 청하여 청주로 달려간 아들 이경여가 어머니 송씨를 찾아뵙고 장만해간 물품을 어머니께 공양(供養)하자, 어머니는 “전쟁으로 민력(民力)이 고갈되어, 백성들 가운데에는 틀림없이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숙수(菽水: 콩물)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나만 홀로 무슨 마음으로 이런 것들을 먹겠느냐. 네가 봉록(俸祿)을 받지 않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면,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겠다.”라고 하며 기뻐하지 않았다. 이에 이경여는 임금에게 하사받은 은사(恩賜) 물품과 고을의 수령들이 보내준 선물을 번번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머니 송씨가 임종(臨終)할 때 맏아들 이경여에게 유언하기를, “너는 덕(德)이 돌아가신 네 아버지보다 못한데, 녹봉과 지위는 네 아버지보다 더 많고 높으므로, 나는 그 점이 항상 염려스럽다. 더욱 성실하게 일하고 행실을 조심하여 너를 낳아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고, 충효(忠孝)에 힘써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5세였다. 아들 이경여는 어머니 송씨를 아버지 이수록의 무덤 오른쪽에 합장하고 어머니 말씀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였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백강집(白江集)』
  • 『간이집(簡易集)』
  • 『고대일록(孤臺日錄)』
  • 『기언(記言)』
  • 『동강유집(東江遺集)』
  • 『문곡집(文谷集)』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