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빈양씨(惠嬪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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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4년(세조 10) = ?]. 조선 4대 임금인 세종(世宗)의 후궁.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지냈고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양경(楊景)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숙부는 중추원(中樞院) 동지사(同知事)를 지낸 양후(楊厚)이다. 조선 5대 임금인 문종(文宗)의 비(妃)이며, 조선 6대 왕인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단종을 낳고 세상을 떠나자 단종을 맡아 양육하였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한남군(漢南君)이어(李𤥽), 수춘군(壽春君)이현(李玹), 영풍군(永豊君)이천(李瑔)이다.

세종의 후궁

양혜빈(楊惠嬪)은 내명부(內命婦) 소속의 궁인이었는데, 병약한 세자(문종)를 보살피던 중 세종(世宗)의 후궁이 되어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이에 아버지인 양경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27년 12월 1일)

문종(文宗)의 비(妃)이자 단종(端宗)과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는 단종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는데,(『세종실록』 23년 7월 24일) 세종은 현덕왕후를 대신해서 양혜빈에게 단종과 경혜공주의 양육을 맡게 하였다.(『단종실록(端宗實錄)』 즉위년 8월 7일) 양혜빈은 기껏이 이들의 양육을 도맡았으며 갓난아기 때부터 돌본 단종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였다.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양혜빈은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궁을 떠났으나,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12살 어린 나이의 단종을 보필하기 위하여 궁으로 돌아왔다.(『단종실록』 즉위년 8월 7일) 그러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양혜빈이 단종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궁중을 드나들면서 궁중의 일을 마음대로 한다면서,(『단종실록』 즉위년 8월 7일),(『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윤6월 11일) 홍심(洪深)의 딸이자 문종의 후궁인 홍귀인(洪貴人)을 숙빈(肅嬪)으로 삼아 궁궐의 일을 보살피게 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8월 7일) 이 일로 양혜빈과 수양대군은 매우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세조실록』 1년 윤6월 11일)

1455년(세조 1)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수양대군에게 선위를 하였고,(『세조실록』 1년 윤6월 11일) 이에 수양대군은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양혜빈이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와 자신의 아들인 한남군, 영풍군 등과 결탁하여 난역(亂逆)을 도모하였다며 청풍(淸風)으로 귀양을 보냈다.(『세조실록』 1년 윤6월 11일) 또한 양혜빈의 가산(家産)를 적몰하여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양정(楊汀)에게 주었다.(『세조실록』 1년 윤6월 11일),(『세조실록』 1년 7월 25일) 대신들은 양혜빈의 죄를 법대로 처리하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세조는 양혜빈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상왕(上王) 단종의 부탁으로 대신들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다.(『세조실록』 1년 8월 23일) 그러나 대신들은 거듭하여 양혜빈의 처벌을 요구하였고, 결국 그해 11월 양혜빈은 교수형(絞首刑)에 처해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 1년 8월 22일),(『세조실록』 1년 8월 24일),(『세조실록』 1년 8월 26일),(『세조실록』 1년 9월 3일),(『세조실록』 1년 11월 6일),(『세조실록』 1년 11월 9일)

이렇게 왕실에서 축출된 양혜빈은 중종(中宗) 때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되었고, 명종(明宗)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정조실록(正祖實錄)』 15년 2월 21일) 그리고 숙종(肅宗)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양혜빈과 그의 아들 영풍군의 관작(官爵) 및 봉호(封號)도 회복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 38년 4월 28일) 이때 숙종은 양혜빈의 묘를 봉분하도록 하였으나, 양혜빈의 원래 묘 자리를 찾지 못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이때 양혜빈에게 문혜(文惠)의 시호를 내렸다.(『숙종실록』 39년 4월 2일) 한편 1791년(정조 15) 양혜빈과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시호가 같았으므로, 정조는 양혜빈에게 민정(愍貞)이란 시호를 새로 내렸다. 그리고 한남군의 후손에게 신주를 새로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정조실록』 15년 5월 27일)

묘소와 후손

양혜빈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0-1번지에 있으며, 장남인 한남군과 함께 충청북도 충주시 용관동에 있는 사당에 배향되어 있다.

양혜빈은 세종과의 사이에서 3남을 낳았는데, 1남인 한남군은 예빈녹사(禮賓錄事)권격(權格)의 딸인 양원군부인(梁源郡夫人)안동 권씨(安東權氏)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2남인 수춘군은 부윤(府尹)정자제(鄭自濟)의 딸인 영천군부인(榮川郡夫人)연일 정씨(迎日鄭氏)와 결혼하여 1녀를 두었으며, 세종과 김신빈(金愼嬪)사이에서 태어난 3남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의 아들인 수안군(遂安君)이당(李讜)을 양자로 들였다. 3남인 영풍군은 참판(參判)박팽년(朴彭年)의 딸인 군부인(郡夫人) 순천 박씨(順天朴氏)와 결혼하여 1녀를 두었는데, 만호(萬戶)이양손(李陽孫)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김경수, 「세조대 단종복위운동과 정치세력의 재편」, 『사학연구』83, 2006.
  • 이미선, 「조선 초기의 후궁」, 『사학연구』96, 2009.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