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李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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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8년(성종 19)∼1544년(중종 39) = 57세]. 조선 중기 중종 때의 의친(議親). 천문학자. 기묘(己卯) 명현(名賢). 실직(實職)은 숭선 부정(嵩善副正)이고, 봉작(封爵)은 승헌대부(承憲大夫) 숭선군(嵩善君)이고,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다. 자(字)는 종지(淙之)이고, 호(號)는 마재(磨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세조(世祖)의 서출 제 1왕자(王子) 덕원군(德源君)이서(李曙)이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사직(司直)김종직(金從直)의 딸이다.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와 교제하면서 사림파의 도학(道學) 정치를 지지하였는데,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사림파에 빌붙었다고 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였다. 1520년(중종 15) 영해(寧海)로 귀양 갔다가, 15년 뒤에 개령(開寧)으로 옮겼고, 1534년(중종 29) 사유(赦宥)를 받고, 1538년(중종 33) 복직(復職)되었다. 그는 유학의 육경(六經)에 정통하였고, 음악과 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찍이 천문학의 선기(璿機) 기구를 만들어서 태양계의 움직임을 세상에 알렸다.

중종 시대 활동

중종 때 숭선 부정(嵩善副正) 이총(李灇)은 조광조(趙光祖)와 교제하며 도학(道學)을 논하였다. 정주학(程朱學)에 심취한 그는 자기 집에서 『정주봉사(程朱封事)』라는 책을 인쇄하여 중종에게 바치며 “정치를 하는 방법은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아뢰니, 중종이 가납(嘉納)하고 정주학의 다른 서적(書籍)을 하사하였다. 이총은 또한 당시 정치의 폐단을 극론하고, 궁중의 여악(女樂)을 혁파하라고 상서(上書)하는 한편, 중종의 잠저(潛邸) 때 부인인 신씨(辛氏)를 왕비로 세우자고 주장하다가, 훈구파(勳舊派) 대신들에게 체포되어 유배되었던 사림파(士林派)의 중진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을 석방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는 이처럼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등의 사림파와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 등의 훈구파가 대립할 때, 사림파를 적극 지지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훈구파 대신들은 이총이 조광조의 사림파에 빌붙어 정치에 관여했다고 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추방하였다. 1520년(중종 15) 그의 맏사위 김덕순(金德純)이 조광조의 사림파에 가담하였다가 도망을 치자, 그 장인인 이총을 체포하여 고문(拷問)하고 경상도 영해(嶺海)로 유배시켰다. 이에 이총은 그곳에서 15년간 귀양살이하다가 경상도 개령(開寧)으로 옮겨졌다. 1534년(중종 29) 사유(赦宥)를 받고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와, 1538년(중종 33) 겨우 복직되었다. 집 뒤에 삼을 심고 ‘마재(麻齎)’라는 서실(書室)을 지었는데, 그곳에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다가, 1544년(중종 39) 8월 26일에 돌아가니, 향년 57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 일찍부터 기품과 도량이 크게 이루어졌다.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깊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경한 자세로 몸을 가다듬었으므로, 비록 창졸간에 큰일을 당하더라도 말과 안색이 갑작스럽게 변하지 않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그는 평생의 큰 뜻이 오직 충효(忠孝)에 있었으므로, 어머니를 섬기는 데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가정에서는 모범이 되었고, 집 안팎은 엄숙하고 화목하였다. 재산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때에는 가까운 사람부터 먼 사람까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였으나, 정작 자기 자신은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평소 가난한 선비처럼 재산의 경영에는 뜻이 없었고, 단지 고요히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여, 집 뒤에 삼을 심고 서실(書室)을 지어 편액을 ‘마재(磨齎)’라고 붙였는데, ‘삼 마(麻)자’는 단순히 삼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연구가 ‘깊다[深]’는 뜻이다. 그는 자나 깨나 유학의 육경(六經)에 유영(游泳)하였으므로 육경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음악과 수학에도 절묘하게 정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천문학의 선기(璿機) 기구를 만들어 태양계의 움직임을 세상에 알렸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가 화(禍)를 당하면서, 이총도 멀리 귀양 가게 되었으나, 조광조의 도학(道學) 사상을 독실하게 신봉하고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므로, 유림(儒林)에서 탄복하고 종유(從游)하는 자가 많았다.[이이(李珥)가 지은 묘지명]

1517년(중종 12)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주장하는 도학(道學) 정치가 왕권(王權)을 억제한다고 느낀 중종은 훈구파의 원로 용재(容齋)이행(李荇)을 대사헌에 임명하여, 사림파의 신진 사류(士類)를 억압하게 하였다. 이때 종실(宗室)의 의친(議親) 가운데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는 시산 부정(詩山副正) 이정숙(李正淑)·강녕 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숭선 부정 이총·장성 부정(長城副正) 이엄(李儼) 등이 상소하여 조정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과감하게 바른 말을 하였는데, 중종은 온화한 말로 대답하고 칭찬하였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이때 훈구파가 쓴 사평(司評)을 보면, “이정숙 등 4인은 모두 종척(宗戚)인데, 글을 읽고 학문을 한다고 하여,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일당이 그들과 사귀었다. 그 중에서 이정숙이 가장 유명하였으나, 이정숙이 읽는 책은 사서(四書)에 불과하고, 문의(文義)나 구두(句讀)도 모르는 데가 많았다. 일찍이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가례(家禮)』 등의 글을 읽고, 유사(儒士)들과 토론하였는데, 글 가운데 몇몇 군데를 집어 질문하였으나,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면서, 모두 그를 비웃었다. 4인 중에서 오직 이총(李灇)만이 글을 많이 읽어 경전(經傳)을 거의 익혔고, 이기(李祺)와 이엄(李儼)은 『소학』도 읽지 못하였다. 4인은 항상 뜻과 행동을 같이하였는데 이정숙을 그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하였다.(『중종실록』 12년 10월 27일) 이 사실로 미루어 이총이 유교의 경전에 정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17년(숙종 43) 숙종(肅宗)이 온천(溫泉)에 거둥할 때, 이총의 손자 이만근(李萬根)이 길옆에 엎드려 할아버지인 숭선 부정 이총에게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주기를 간청하니, 숙종이 정2품하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증질(贈秩)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하도록 명하였다. 숙종이 예조에서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예조에서는 “정2품이 아니면, 시호를 줄 수가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끝내 시호는 내려주지 않았다. 1726년(영조 3) 영조가 경종(景宗)의 의릉(懿陵)을 참배할 때 손자 이만근이 다시 길옆에 엎드려 상언(上言)하기를, “조광조가 숭선군을 외우(畏友)라고 하며 서로 교제하기를 허락하였고, 그 뒤에 이이(李珥)가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쓰면서 칭찬하여 마지않았으니, 그의 학문의 연원(淵源)이 정대(正大)하고 정주학(程朱學)에 조예(造詣)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숭선군은 진실로 훌륭한 순유(醇儒)라고 할 만합니다. 도학(道學)으로 보나 절행(節行)으로 보나, 비록 품계를 뛰어넘어 시호(諡號)를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더라도, 어찌 정도에 넘치겠습니까.” 라고 간청하니, 영조가 마침내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비문]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묘소는 경기 고양(高陽) 식사리(食寺里)에 있는데,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비문] 손자 이만근은 시호를 내려주라는 영조의 어명을 받들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대제학(大提學)이의현(李宜顯)을 찾아가 시장(諡狀)의 찬술을 부탁하고, 이어 묘비명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였다.[비문]

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반성위(班城尉)강자순(姜子順)의 부실(副室)의 딸이다.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연창 도정(延昌都正) 이학수(李鶴壽)이고, 차남은 연성수(延城守) 이미수(李眉壽)이다. 장녀는 참봉(參奉)김덕순(金德純)에게, 차녀는 사인(士人) 홍수기(洪守紀)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에서 4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연광정(延光正) 이영수(李永壽)·연원수(延源守) 이억수(李億壽)·연풍령(延豐令) 이의수(李宜壽)·괴산정(槐山正) 이만수(李萬壽)이고, 딸은 박용수(朴龍壽)·박양주(朴良柱)·강문주(姜文周)·이찬(李灒)에게 각각 시집갔다.[비문] 손자 이만근(李萬根)은 연광정 이영수의 맏아들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도곡집(陶谷集)』
  • 『대동야승(大東野乘)』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