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李廷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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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7년(선조 20)~1643년(인조 21) = 57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창원 부사(昌原府使)이다. 자(字)는 용부(用孚)이고, 호(號)는 지천(智川)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태릉 참봉(泰陵參奉)이개(李愷)이고, 어머니 칠원윤씨(漆原尹氏)는 학생(學生) 윤충남(尹忠男)의 딸이다. 양녕대군 (讓寧大君)의 8대손이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현당(李賢讜)의 현손이다.[『선원록』] 관찰사민광훈(閔光勳)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민광훈의 아들 민정중(閔鼎重)과 민유중(閔維重: 인목대비 아버지) 형제가 어렸을 때, 그에게 글을 배웠다.

<인조반정> 이후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가서, 형조(刑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직후,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으나, 공서파(功西派)에게 미움을 받아 외직으로 밀려나, 이천 부사(利川府使)·창원 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사마방목』] 그해에 어머니가 돌아가고, 1618년(광해군 10) 또 할머니가 돌아가면서, 선산(先山)에서 잇달아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례를 치르느라 광해군 시대에는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627년(인조 5)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1세였다.[『문과방목』] 그해에 바로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 1628년(인조 6) 외직으로 나가서 함경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고, 1629년(인조 7) 연서 찰방(延曙察訪)이 되었다가, 1630년(인조 8)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전임되었다. 1631년(인조 9년) 천추사(千秋使)김시국(金蓍國)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해로(海路)로 명나라의 서울 북경에 다녀왔는데, 배를 타고 항해(航海)할 때, 풍랑을 만나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1632년(인조 10)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강원도 울진 현령(蔚珍縣令)으로 나갔다. 임기를 채우고 돌아와 형조(刑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성균관 사예(司藝)·통례원 상례(相禮)를 거쳐, 총융사(摠戎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634년(인조 12) 인조가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고 부묘(祔廟)할 때, 책문(冊文)·고명(誥命)을 받드는 집사(執事)가 되어 부묘례를 행하였는데, 의례가 끝난 다음에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인조실록』 12년 윤8월 21일)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봉상시(奉常寺) 첨정(僉正)에 임명되어,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싸웠다. 1637년(인조 15) 1월에 화의(和議)가 이루어져서 청나라 군사가 물러간 후, 임금이 환도하여 호종(扈從)한 신하들에게 은상(恩賞)을 베풀었는데, 이정규는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곧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교체되었다. 1638년(인조 16) 강원도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곧 경기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전임되었는데, 그가 풍질(風疾)을 앓았기 때문에 먼 고을에서 가까운 고을로 임지를 바꾸었던 것이다. 1639년(인조 17) 평안도 덕천 군수(德川郡守)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전임되었다. 1643년(인조 21) 경상도 창원 부사(昌原府使)에 임명되었는데, 병든 몸으로 먼 길을 가느라 중풍(中風)이 심해져서 부임하자마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7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맑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였으나, 일을 할 때에는 위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그의 절친한 친구 민광훈(閔光勳)은 그의 성품에 대하여, “겉은 너그러우나 속은 단단하다.”고 하였다.[비문] 그는 항상 검약(儉約)한 생활을 하였고 영예(榮譽)에 연연하지 않았다. 남과 교유(交游)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당로자(當路者)를 찾아다니며 벼슬을 청탁한 적도 없었다.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일을 맡으면 쉽고 어려운 것을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는데, 청렴결백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비문]

1592년(선조 25) 이정규의 나이 겨우 6세 때 할아버지가 함경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어 영흥(永興)으로 부임하자, 온 가족이 함께 따라갔다. 얼마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잇달아 돌아가자, 어머니 윤씨가 두 분의 상(喪)을 치른 후,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외롭고 의탁할 데가 없었던 어머니 윤씨는 어린 아들 이정규를 어루만지며, “이씨 집안 3대가 네 한 몸에 달려 있으니, 네가 스스로 공부에 힘써서 집안을 이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정규는 어머니의 훈계에 따라 스스로 학문할 뜻을 세우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글을 배웠는데,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공부를 쉬지 않았다. 왜란을 겪은 후인 데다가, 집이 가난하여 서책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이정규는 항상 남에게 책을 빌려 공부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책을 돌려달라는 독촉을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공부를 계속하기가 무척 어려웠으나, 책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아들의 대과 급제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의 묘소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던 그는 세상을 많이 비관하였다. 마침 이 시기의 정치가 혼란을 거듭하였으므로, 이정규는 두 분의 상기를 끝마치고도 시골에 숨어 살며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비문]

1631년(인조 9년) 천추사(千秋使)김시국(金蓍國)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서울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다. 당시 후금(後金)의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점령하여, 중국으로 가는 육로(陸路)가 막혔으므로 사행(使行)은 해로(海路)를 이용할 수 밖 에 없었는데, 중국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항해(航海)하여 가도(椵島: 피도) 등 여러 섬을 거쳐 평안도 선사포(宣沙浦)로 돌아왔다. 사신일행의 배는 4~ 5척으로 구성되었는데, 상선(上船)에는 정사(正使)와 서장관이 타고, 나머지 배는 여러 가지 교역품과 잡물을 싣고 수군(水軍)이 탔다. 이들 사신일행이 해로로 돌아올 때,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 한 일이 있었는데,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울부짖었으나, 서장관이정규는 똑바로 앉아서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태풍이 지나가고 회오리바람이 그친 후, 정사김시국(金蓍國)은 서장관이정규를 칭찬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존경하였다.[비문]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는데, 날이 춥고 눈이 내렸다. 인조는 병사들이 얼어 죽을까봐 염려하여, 배종(陪從)한 신하(臣下)들 가운데 옷을 겹쳐 입은 자들에게 겉옷을 벗어서 병사들에게 입혀주라고 명령하였는데, 이정규는 갖옷과 홑옷을 모두 벗어서 입혀주었다. 남한산성에서 47일 동안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지면서, 청나라 군사의 포위가 풀리자, 사람들은 다투어 남한산성의 4대문을 빠져나와 사방으로 흩어져 자기 가족을 찾기에 바빴으나, 이정규는 홀로 임금을 따라 대궐로 들어가 기거(起居)하며 궁궐 안을 깨끗하게 정비정돈하고 난 후에 비로소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지켜본 인조가 그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하였다.[비문]

그러나 공서파(功西派)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에서 “동부승지이정규는 본래 이력도 없고 이름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승지의 중임을 맡겨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니, 그를 체직(遞職)하소서. 하고 이정규를 탄핵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직임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살펴보고 그 사람을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 사람의 이력(履歷)에만 얽매이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인조반정>에 직접 참여하여 공을 세운 공서파는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가 중요한 요직에 진출하는 것을 항상 견제하였는데, 공서파(功西派)의 영의정김류(金瑬)는 처음부터 청서파에 속한 이정규를 언짢아하며 계속 배척하였고, 결국 먼 변방의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시켰으나, 그는 태연하게 이를 개의치 않았다.

1638년(인조 16) 강원도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었다가, 경기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전임되었을 때, 마침 경기 경차관(敬差官)이 전토(田土)를 점검하였는데, 그는 누락된 토지를 종합하여 합산한다고 핑계하며 억지로 전결(田結)의 숫자를 늘리려고 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관들은 그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으나, 이천 부사이정규는 “내가 수령관으로서 어찌 백성들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라고 하며 홀로 반대하였다. 인조 때 경기 지역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려고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는데, 백성들은 누락된 전결(田結)을 찾아내어 세금을 매기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이정규는 이천 부사에서 파직되었다.[비문]

집에 있을 때에는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고,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행탁(行橐: 배낭)이 씻은 듯이 텅텅 비어 있었으며, 여러 고을의 수령관을 맡았으나 사치스러운 물건은 하나도 장만한 적이 없었다. 항상 녹봉(祿俸)만으로 생활하다보니 어머니를 봉양하고 아이들을 먹일 양식이 부족하였는데, 이정규는 종신토록 이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다. 죽을 때 세 아들에게 “3대의 유고(遺孤)인 내가 수명은 50세를 넘기고, 아들과 손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모두 우리 선대에서는 없었던 일이니,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비문] 이정규는 3대에 걸쳐 외아들로 대를 이어오다가, 그가 57세의 나이로 죽을 때, 아들 3형제와 손자 8형제를 두었기 때문이다. 장남 이민영(李敏榮)은 이공로(李公老)·이공망(李公望)·이공필(李公弼)·이공신(李公藎) 4형제를 낳았고, 차남 이민급(李敏及)은 이공익(李公翼)·이공화(李公華)·이공유(李公裕) 3형제를 낳았으며, 3남 이민징(李敏徵)은 이공윤(李公胤)을 낳았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파주(坡州) 동쪽 지천동(知川洞)의 언덕에 있는데, 노봉(老峯)민정중(閔鼎重)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된 김성진(金聲振)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민영(李敏榮)은 진사(進士)로서 참봉(參奉)을 지냈고, 차남 이민급(李敏及)은 생원(生員)으로서 참봉(參奉)·봉사(奉事)를 지냈으며, 3남 이민징(李敏徵)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다. 장녀는 정세흠(鄭世欽)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명담(李命聃)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부사(府使)유석귀(柳錫龜)에게 시집갔다.[비문]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조선태조 때 개국 공신인 계림군(鷄林君)김균(金稛)의 후손이며, 선조 때 영의정(領議政)유전(柳㙉)의 외손녀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자비로워서, 가족을 어루만지고 이웃을 대하는 데 은의(恩義)가 있었으며,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에 유무(有無)를 헤아리지 않았다. 조상을 받드는 데에 더욱 정성이 지극하여,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지만, 제사에 쓸 제물을 반드시 미리 장만하여 부족하지 않도록 하였다. 남편 이정규(李廷圭)보다 26년을 더 살다가, 1670년(현종 11)에 돌아갔는데, 향년 84세였다. 자손들이 남편 이정규의 무덤 왼쪽에 합장하였다.[비문]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노봉집(老峯集)』
  • 『청선고(淸選考)』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