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계(李重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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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6년(명종 21)∼1619년(광해군 11) = 54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지평(持平)·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증직(贈職)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이다. 자(字)는 술부(述夫)이고, 호(號)는 송파(松坡)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이경림(李景霖)이고, 어머니 안씨(安氏)는 사헌부 집의(執義)안사언(安士彦)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6대손이고, 영의정김자점(金自點)의 처조부이다. 성호(星湖)이익(李瀷)과 가깝게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경상도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가 강폭한 토호(土豪)를 억압하고 약한 농민들을 도왔다. 그러나 이웃 고을 합천(陜川)에 살던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토호의 편을 들어 삼가 현감이중계를 포악한 수령관이라고 중앙에 보고하면서, 파직 당하였다. 광해군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공조 좌랑(工曹左郞)·호조 정랑(戶曹正郞)이 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파직 당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을 때에는 대북(大北)의 이이첨 일당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에서 모두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홀로 이에 반대하다가 또 파직 당하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 [『국조방목(國朝榜目)』]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늙고 병들었으므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음직으로 나가, 의금부 도사(都事)에 보임되었다. 그 뒤에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으로 전임되었다가,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후, 강원도 횡성 현감(橫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경상도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체임되었다. 그는 삼가 현감이 되어 강폭한 토호(土豪)를 억압하고 약한 농민들을 도우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기뻐하였다.[비문]

<임진왜란> 당시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은 경상도 합천(陜川)에 거주하면서, 각 군읍(郡邑)의 수령관의 치적을 평가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선조는 의병장 정인홍의 의견을 중시하였으므로, 그의 평가에 따라 수령관을 오래 유임시키기도 하고, 파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중계는 집안이 서인(西人)이었으므로, 북인(北人)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삼가 현감이중계는 부임한 후, 내암(萊菴)정인홍에게 인사를 가지 않았다. 이에 정인홍은 크게 노하여 선조에게 삼가 현감이중계를 포악한 수령관이라고 보고하였고, 마침내 이중계는 파직 당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중계는 벼슬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과거를 보기로 결심하고, 오로지 공부에 열중하였다.

1615년(광해군 7) 마침내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0세였다. 얼마 후, 공조좌랑(工曹左郞)에 임명되었는데,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데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공조 좌랑으로서 황해도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황해도 장연(長淵)에 가서 목재로 쓸 나무를 베어오는 일을 담당하였다.(『광해군일기』 8년 6월 19일) 1616년(광해군 8)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승진하였는데, 『선조실록』기주관을 그대로 겸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고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할 때, 호조 정랑이중계는 이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하다가,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으로 좌천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대간에서 인목대비를 폐출하자는 논의를 발의한 것에 대하여 혼자 반대하다가, 마침내 파직 당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6월 4일) 대북의 이이첨 일당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결국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울화병이 생긴 그는 결국 1619년(광해군 11) 7월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겉으로는 따뜻하고 온화하였으나, 내면은 엄하고 아주 굳세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구차스럽게 굴하지 않았는데, 그의 용맹함을 어느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비문]

이중계(李重繼)가 경상도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있을 때, 내암(萊菴)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 살면서, 경상도 군읍(郡邑)의 수령관의 치적을 평가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정인홍은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우두머리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친구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3천여 명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현지에 있는 그의 의견을 중시하였다. 그가 칭찬하는 수령관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나, 그가 평가 절하하여 보고하는 수령관은 당장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경상도 지방의 수령관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정인홍은 수령관이 그에게 아부하면 칭찬해서 승진시키고, 그를 멀리하면 비방해서 좌천시키거나 파직시켰다. 이처럼 대북의 영수 정인홍은 중앙 정계로 나오기 전에 고향 합천에서 토호(土豪)처럼 전횡하면서 농간을 부렸다. 이중계가 다스리는 삼가현은 정인홍이 거주하는 합천군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나, 현감이중계는 한 번도 정인홍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한번 만나보기를 요청했으나, 이중계가 도리어 이를 사양하였다. 결국 크게 노한 정인홍은 조정에 있는 대북(大北) 이이첨(李爾瞻) 일당으로 하여금 삼가 현감이중계를 탄핵하도록 하였고, 마침내 그를 파직시켰다.[비문]

선조 말년에 정인홍은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중앙 정계로 나왔는데, 대북의 정인홍과 이이첨 일당은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였고, 소북(小北)의 최영경(崔永慶)과 대다수의 서인(西人)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감싸고 돌았다. 그러므로 서인 집안 출신의 이중계는 대북(大北)의 정인홍·이이첨(李爾瞻) 일당과 여러 차례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大北)의 정인홍·이이첨 일당이 정권을 잡았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은 <강변칠우(江邊七友)>의 은화(銀貨) 강탈 사건을 취조하다가, 이 사건을 마침내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확대시켰다. <강변칠우(江邊七友)>는 서인의 중진 집안 서자 출신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7명이 여주 남한강변에 모여 서자가 출세할 수 없는 세상을 원망하다가, 지리산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서자 출신 허균이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이첨은 그들이 은화를 훔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할 거사 자금으로 쓰려고 하였다는 자백을 받아낸 후, 마침내 이를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확대시켜 영창대군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더 나아가 그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까지 폐출시키려고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은 마침내 대간(臺諫)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사주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자는 논의를 발의하였는데, 허균(許筠)·김개(金闓) 등이 유생(儒生)을 동원하여 하루에도 6, 7차례나 상소하고, 또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에게 연명으로 상소하여 인목대비를 폐위하도록 청하도록 하니, 광해군은 이를 대신들과 논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영의정기자헌(奇自獻)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이이첨은 백관들을 정부(政府)의 뜰에 모아놓고 인목대비의 폐위를 의논한 다음에 왕에게 폐위를 청하는 상소를 각자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것을 <정청(庭請)> 운동이라고 한다. 이때 병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헌의(獻議)하도록 하였다. <정청>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245명이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38명이었다.(『광해군일기』 9년 11월 25일) 당시 신료 가운데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북(大北)의 정인홍·이이첨 등의 위세에 눌려서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때 이중계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었는데, 대북(大北) 일당이 그에게 의견을 묻자 그는 “대비의 폐출 문제는 아주 중대한 일이니, 소관(小官)이 참여할 일이 아닙니다.” 라고 엄숙하게 대답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은 이중계가 인목대비의 폐출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비문]

1618년(광해군 10) 봄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이중계는 허균(許筠)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자는 <폐모론(廢母論)>을 앞장서서 주장하는 데 격분하여, 허균을 탄핵하다가, 허균이 반역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극언(極言)까지 하였다. 대간(臺諫)에서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이이첨 일당의 사주를 받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자는 논의를 발론(發論)한 다음에 폐모론(廢母論)은 더욱 힘을 얻었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지평이중계를 제외하고 모두가 인목대비를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그는 병을 핑계대고 휴가를 얻어 집에 있었는데, 동료 윤인(尹訒)과 서국정(徐國楨) 등이 직접 그를 찾아와 설득하며 함께 상소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지평이중계는 “모후(母后)를 폐출해야 한다는 논의를 나는 죽어도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며 거절하였다.

그 후, 이중계는 집안사람들에게 “신하가 국모(國母)를 폐출한다면 그보다 심한 죄악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천하의 악명(惡名)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어 그는 조정에 나아가 인목대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석고대죄(席藁待罪)하였으나, 광해군이 몸을 조섭(調攝)하는 중이었으므로 승정원에 명하여, 상소(上疏)와 차자(箚子)를 받지 말도록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조정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 이중계는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결국 걱정 근심과 비분강개한 마음에 쌓여 마침내 병이 되면서 피를 토하고 자리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광주(廣州) 동쪽 장의동(壯義洞)의 언덕에 있는데, 죽음(竹陰)조희일(趙希逸)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둘째아들 이필달(李必達)이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정사(靖社)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자, 아버지 이중계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부평 부사(富平府使)김시회(金時晦)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長男) 이극달(李克達)은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을 지냈고, 차남(次男) 이필달(李必達)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고, 3남 이석달(李碩達)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찰사·방어사(防禦使)와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냈으며, 장녀(長女)는 사인(士人) 심정양(沈廷揚)에게 시집갔고, 차녀(次女)는 박지태(朴之泰)에게 시집갔다. 장남 이극달(李克達)의 맏사위가 낙흥군(洛興君)김자점(金自點)이고, 둘째사위가 부사(府使)민응건(閔應騫)이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죽음집(竹陰集)』
  • 『간이집(簡易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