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성(李相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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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3년(현종 4)∼1723년(경종 3) = 61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병조 참의(參議)와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화경(華卿)이고, 호는 영은(穎隱)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지낸 이지하(李祉遐)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한진(韓震)의 딸이다. 양할아버지는 이효훈(李孝訓)이며, 친할아버지는 이효형(李孝詗)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여량(李汝良)이다. 극진한 효자로 유명하다.

숙종~경종 시대 활동

1697년(숙종 23)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처음으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1699년(숙종 25) 의정부 사록(司錄)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숙종실록』 25년 6월 6일) 이어 예조(禮曹)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 병조 정랑(正郞)을 거쳐 서산현감(瑞山縣監)과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와 강원도도사, 울진현감(蔚珍縣監)을 역임하였다.

1712년(숙종 36)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가 되었고, 1713년(숙종 39)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된 후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 1714년(숙종 40)에는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1715년(숙종 41)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이어 장악원(掌樂院) 정(正)에 임명되었다.

1717년(숙종 43)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어,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718년(숙종 44) 형조 참의(參議)를 역임하다가 병조 참의로 옮겼다.(『숙종실록』 44년 3월 14일),(『숙종실록』 44년 8월 24일) 그 뒤에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722년(경종 2)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으나,(『경종실록』 2년 6월 21일) 손가락에 악성 종기가 생겨 1723년(경종 3) 7월 8일 부사로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1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상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단순하고 솔직하여 가식이 없고 자질구레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행동이 겉으로 보기에 조금 엉성한 것 같지만, 마음속에는 충절을 굳게 지키려는 신념에 넘쳤다.

1699년(숙종 25) 6월 숙종이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구언(求言)하자, 의정부 사록이었던 이상성은 임금의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궁중에서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임금이 기호(嗜好)와 욕망을 절제하며 언로(言路)를 넓힐 것을 청하였다. 숙종 전반기는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을 사랑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廢黜)시켰다가 다시 복위시키면서 온갖 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죽음을 당하여 복잡한 시기였다. 집권 대신들도 숙종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직언(直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충절을 굳게 지키려는 신념에 가득 찬 이상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直言)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의정부 사록이상성은 “궁중에 사치가 풍습을 이루어, 복어(服御 : 의복과 탈것) 등의 물품이 날로 더욱 화려해져 가고 있습니다. 후궁을 더 두는 일은 실로 후사(後嗣)를 넓히려는 뜻에서 나왔으나, 단지 여색(女色)은 마음을 현혹시키고 덕을 해치므로, 한미한 백성과 일개 선비도 오히려 조심하고 삼가는데, 하물며 만백성이 추대하는 천금 같은 옥체(玉體)로서 자애(自愛)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영예(英銳)가 너무 지나쳐 희로(喜怒)가 어긋나기도 하는데, 근년 이래 항상 지나친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좌우의 신료들이 황공하고 두려워하여 한 마디도 깨우치려는 말이 없이 각기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신하들을 곡진하게 교유(敎諭)하여 스스로 저상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숙종이 화를 참고 가납(嘉納)하였다.(『숙종실록』 25년 6월 6일) 왜냐하면 숙종은 구언을 할 때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용서한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성은 어렸을 적부터 부모를 섬기는 효행이 지극하여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하였을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바치니 병이 바로 나았다. 또 아버지의 상고(喪故)를 당해서는 너무나 슬퍼하다가 몸이 여위어 병이 났는데, 어머니가 약물을 달여 아들에게 마시기를 권하였음에도 이상성은 눈물을 흘리며 마시지 아니하였다. 또 어머니가 병을 앓을 적에도 이상성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바치고, 신령에게 빌며 자신이 대신하기를 애원하니, 이상하게도 징험이 있어서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었다. 어머니는 그 뒤에 오래도록 장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것을 보고 친구 권상유(權尙游)가 감탄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아직 효도 노릇을 이상성과 같이 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였다. 이상성은 처음부터 여러 차례 손가락을 베어낸 탓으로 손가락에 악성 종기가 생겨서 회갑을 맞이하던 해에 삼척부사로 집무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까운 친구 이의현(李宜顯)은 그의 묘갈명(墓碣銘)에서, “이상성은 결국 효도를 하다가 죽은 것이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의 복성동(福城洞) 갈치리(葛峙里)에 있는데, 이의현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진사(進士) 윤성(尹)의 딸이고, 둘째 부인 청주 곽씨(淸州郭氏)는 학생(學生) 곽홍징(郭弘徵)의 딸이다. 파평 윤씨는 1남 1녀를 낳았고, 청주 곽씨는 2남을 낳았다. 장남 이광운(李光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헌납(獻納)을 지냈고, 차남 이광진(李光進)은 진사로서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3남은 이광통(李光通)이다. 딸은 사인(士人) 송징원(宋澄源)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곡집(陶谷集)』
  • 『갑봉유고(甲峰遺稿)』
  • 『만정당집(晚靜堂集)』
  • 『옥오재집(玉吾齋集)』
  • 『야당유고(野堂遺稿)』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갑봉유고(甲峰遺稿)』
  • 『죽천집(竹泉集)』
  • 『병계집(屛溪集)』
  • 『학당유고(鶴塘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