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빈(李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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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7년(중종 32)∼1603년(선조 36) = 67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평안도 병마사(兵馬使)·순변사(巡邊使)이고, 증직(贈職)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이다. 자(字)는 문원(聞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옥천(沃川)이다. 아버지는 서흥 부수(瑞興副守) 이춘억(李春億)이고, 어머니 상산김씨(商山金氏)는 첨정(僉正)김국량(金國良)의 딸이다. 덕천군(德泉君)이후생(李厚生: 정종의 제 10왕자)의 현손이고, 송림군(松林君)이효창(李孝昌: 이효백의 동생)의 증손자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 3) 식년(式年)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무과방목』] 무과에 급제한 직후에 권관(權管)에 보임되었고, 선전관(宣傳官)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충청도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나갔다가, 비변사 낭청(郎廳)을 거쳐 함경도 풍산 만호(豊山萬戶)가 되었다. 함경도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어머니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여 자급(資級)이 강등되었다. 그 후, 경상도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가,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을 거쳐, 경상도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었고, 평안도 우후(虞候)를 거쳐 함경도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올랐다.[비문] 북쪽 변경 지방의 우후·만호 등을 역임하면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 공훈을 세워 북병사(北兵使)를 지낸 명장 이일(李鎰)·신립(申砬)과 비견할 만한 무장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비변사(備邊司)에서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를 추천할 때, 이빈도 이순신(李舜臣)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589년(선조 22) 1월, 선조가 비변사(備邊司) 대신들에게 무신(武臣) 가운데 자급을 따지지 않고 발탁하는, 이른바 ‘불차 채용(不次採用)’할 인물을 천거하도록 명하자, 북인(北人)의 영상 이산해(李山海)가 이순신(李舜臣)·이빈·신할(申硈: 신립의 형) 등을 추천하였다.(『선조실록』 22년 1월 21일) 그해 7월, 좌부승지황우한(黃佑漢)이 비변사의 밀계(密啓)에 의거하여 “병사(兵使)·수사(水使)에 적합한 인물로 이빈·신할(申硈)·조경(趙儆) 등을 서계(書啓)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선조실록』 22년 7월 28일) 당시 동인 출신의 비변사 대신들은 이빈을 병마사에 임명할 만한 걸출한 인물이라고 추천하였으나, 서인 출신의 비변사 대신들은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을 명장이라고 천거하였는데, 이일과 신립은 모두 북병사(北兵使)로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다에서는 수사(水使)이순신이, 육지에서는 병사(兵使)이빈이 용맹을 떨쳤으나, 오히려 명장이라고 일컬어지던 신립과 이일은 여지없이 패사(敗死)하거나 패주(敗走)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이일은 이빈과 경쟁 관계에 놓여 서로 협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비변사(備邊司) 대신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조정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1592년(선조 25) 2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나, 그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빈을 기복(起復)시켜 경상좌도 병마사(兵馬使)에 임명하였다. 앞서 경상도 순변사이일(李鎰)이 관군을 이끌고 상주(尙州)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주(敗走)하였으므로, 이빈은 충주(忠州)로 가서 도순변사(都巡邊使)신립(申砬)을 도와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싸웠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지면서 왜적의 대군에게 포위되자, 신립은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병마사이빈이 서울로 돌아오자, 서인 출신의 좌의정윤두수(尹斗壽)는 “이빈에게 죄를 주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선조에게 아뢰었으므로, 이빈은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서 신길(申硈: 신립의 동생)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북상하는 왜적을 임진강(臨津江)에서 방어하게 되었다. 이때 이빈은 중위장(中衛將)을 맡았는데, 그 선봉인 신길이 왜군의 유인 작전에 넘어가면서 선봉이 무너지자, 여러 장수들이 각기 자기 군사들을 챙겨서 배를 타고 도망하였고, 도원수김명원은 임진강 전투에서 패한 책임을 물어 자급(資級)을 강등당하였다. 당시 이빈은 도망하였으나, 동인이었던 도원수김명원이 이빈을 변명해주면서 월곶진(月串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좌천하는데 그쳤다.

월곶진 첨절제사로 부임한 이빈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윤담(尹湛)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전라도 병마사최원(崔遠)을 도와 왜적 2백여 명을 사살하고 수급(首級) 92과(顆)를 얻었다. 그 공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이원익(李元翼) 휘하의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그해 6월, 평양의 왕성탄(王城灘)에서 도순찰사이원익과 방어사이빈이 도원수김명원과 함께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자, 선조는 이원익을 평안도 감사(監司)로, 이빈을 평안도 병마사(兵馬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세자 광해군은 분조(分朝)를 이끌고 강원도 이천(伊川) 지방으로 나가서 관군과 의병(義兵)을 독려하였는데, 한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배를 타고 강원도로 도피하였던 순변사이일은 군사를 이끌고, 세자의 분조(分朝)에 합류하였다. 세자 광해군은 강원도 이천·통천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순변사이일이 관군을 이끌고 세자를 도와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세자의 분조(分朝)를 견제하면서, 분조(分朝)는 1년여 만에 폐지되었으나, 경쟁 관계에 놓인 분조(分朝)의 이일과 본조(本朝)의 이빈은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

왜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다시 의주(義州)를 향하여 북상하자, 평안도 병마사이빈은 평양의 서쪽 순안(順安)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의 북상을 굳게 차단하였다. 순변사(巡邊使)이일도 대군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도착하였으나, 이빈과 이일은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협력하지 않았다. 병마사이빈이 홀로 정예 부대를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두 번이나 대패하였다. 그해 10월, 서인 출신의 체찰사정철(鄭澈)이 병마사이빈의 자급(資級)을 강등시켰으나,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선조가 이빈의 자급을 회복시켰다. 그해 11월, 서인 출신 비변사 대신들이 평안도 병마사이빈은 오직 수비에만 전력을 기울이지만, 순변사이일은 전공(戰功)을 많이 세웠다고 하여, 이일을 평안도 병마사로 삼고, 이빈을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시켰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을 수복할 때, 중추부 동지사이빈도 관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는데, 명나라 군사들이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해자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이빈은 본인이 조직한 90여 명의 궁수(弓手) 부대로 하여금 왜적을 향하여 맹공을 퍼붓도록 하였다. 이 공격으로 왜적이 감히 명나라 군대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이빈은 다시 평안도 병마사(兵馬使)에 임명되었고, 이일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되었다. 그해 2월에는 병마사이빈이 이일을 대신하여 순변사(巡邊使)로 임명되었다. 이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관군과 명나라 군사가 일제히 남하(南下)하였는데, 파주(坡州)의 벽제관(碧蹄館)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아 명나라의 선봉 부대가 패배하면서, 제독 이여송은 명나라 군사를 모두 거두어서 퇴각하려고 하였다. 순변사이빈은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퇴각하지 말도록 간청하였으나, 이여송은 결국 군사를 퇴각시켰는데, 그때 명나라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여 왜군의 장수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와 강화(講和) 회담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해 3월,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이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탈환하려고 할 때, 도체찰사유성룡의 명령을 받은 순변사이빈은 권율과 함께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 3만 명을 격파하고 <행주(幸州)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철수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경상도 상주(尙州)와 전라도 남원(南原) 등지에서 명나라 군사와 연합전선을 펼친 결과, 왜적에 대승하였다. 이빈은 운봉(雲峰)의 팔량치(八良峙)를 굳게 지켜 왜적이 전라도로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 한편 명나라와 강화(講和) 조약을 맺고 철수하던 왜군들은 앞서 일본의 관백(關伯)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진주 대첩>때 패전한 것을 반드시 복수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에 진주(晉州)로 일제히 집결하여, 그해 5월에 진주성을 총공격하였다. 이때 진주성이 함락되고, 5만여 명의 진주 사람들이 모두 옥쇄(玉碎)하였다. 당시 경상도 지방에 주둔하였던 관군과 명나라 군사들은 왜군에 의해 길이 막혀서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이때 진주와 가까운 의령(宜寧)에 주둔하고 있었던 순변사이빈은 스스로 장계(狀啓)를 올려,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한 죄를 처벌하여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이빈을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그해 12월, 경기 수사(水使)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 1월, 대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경기 수사(水使)이빈(李鬢)도 전염병에 걸렸으나, 왜적 토벌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해 2월, 이빈은 군민(軍民)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경기 수영(水營)을 대정도(大靜島)로 옮기고 둔전(屯田)을 개척하였다. 또한 섬의 백성들 가운데 건장한 사람을 뽑아 수군(水軍)으로 편성하여 훈련을 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노역(櫓役)에 종사하게 하면서, 경기의 수군과 전선(戰船)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증가하게 되었다. 그해 3월, 경상도 순변사(巡邊使)가 되었다. 그때 적장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김해(金海)와 웅천(熊川)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상도 순변사이빈(李薲)은 의령(宜寧)을 지키면서 왜적이 서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막았다. 그해 10월, 코니시 유키나카가 경상우도 순변사이빈(李薲)에게 ‘창원부(昌原府)에서 만나보자.’고 편지로 협상을 제의해 왔다. 이에 비변사(備邊司)에서는 경상우도 병마사김응서(金應瑞)를 창원에 보내어 코니시 유키나카와 협상하여, 서로 잠정적으로 싸우지 않고 평화를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빈(李薲)이 임의로 왜적의 진영에 격서(檄書)를 보냈다. 그런데 왜적이 격서에 답한 내용이 오만하고 방자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진노한 선조가 이빈을 파직시켰다.

1595년(선조 28) 1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옥천(沃川)으로 돌아왔다. 이빈은 <임진왜란> 7년 중에서 전쟁이 가장 치열하였던 초기의 만 3년 10개월 동안 싸움터에서 관군을 이끌고 왜적과 격렬히 싸웠다. 마치 바다에서 이순신이 원균(元均)과 다투면서 수군을 이끌고 싸웠던 것처럼 육지에서는 이빈이 이일과 다투면서 관군을 이끌고 싸웠다. 이때 그가 고향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출전한 지 4년 만에 아무 탈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저들이 나에게 무쇠도 녹일 정도의 들끓는 험담(險談)을 퍼부었지만, 나는 정말 죄가 없다. 그렇다고 한들 나의 명예가 훼손되겠으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평생 의리(義理) 하나만으로 휴척(休戚)을 같이 하였으며, 일편단심 충성심에 변함은 없었다. 저들의 수많은 훼방을 받아 왜적을 완전히 토벌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아쉬운 일이므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행장] 이때 선조는 “이빈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만일 강적이 나온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고 걱정한 나머지 그해 말에 이빈을 충청도 도사(都事)에 임명하였다.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천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났다. 충청도 도사(都事)이빈은 감사(監司)이정암(李廷馣)과 함께 이를 진압한 후, 역적들을 심문하여 주동자 몇 사람만 처형하고 나머지 가담자는 모두 석방하였다. 그때 사헌부에서는 “역적들을 다스리는 옥사(獄事)는 조정의 명령 없이는 감히 멋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청도 도사이빈은 정산(定山)에 가둔 역적들을 몇 사람만 참(斬)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는데, 그가 자기 마음대로 처결한 것이 80여 명이나 되니, 지극히 놀랍습니다.”라며 탄핵하였다.(『선조실록』 29년 7월 29일) 결국 충청도 도사이빈은 충청도 감사이정암과 함께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석방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98년(선조 31)초, 이빈은 중앙의 무관직인 오위(五衛)의 부사직(副司直)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 3도 수군(水軍) 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 노량(露梁)에서 명나라 수군 제독(提督) 진린(陳璘)의 도움을 받아, 퇴각하는 왜선(倭船) 5백여 척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1599년(선조 32) 부사직(副司直)이빈은 명나라 수군(水軍) 연위사(延慰使)에 임명되어, 수군(水軍) 제독 진린(陳璘)을 맞이하여 접대하였다.(『선조실록』 32년 3월 15일) 그 후, 이빈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옥천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행장] 만년에 고향에서 한가하게 지내다가, 1603년 선조 36년) 11월 28일 노병으로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7세였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운 사람들을 뽑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하였는데, 당시 정권을 잡았던 서인이 동인출신의 무장(武將) 이빈 등과 의병(義兵) 곽재우 등은 제외하고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과 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 등 18명을 뽑았다. 이빈이 <선무공신>에서 제외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영의정이항복(李恒福)의 제의로 <이몽학(李夢鶴) 난>을 평정하는 데 무공을 세운 사람들을 뽑아 <청난공신(淸難功臣)>을 책훈하였다. 그러나 홍가신(洪可臣)·박명현(朴名賢) 등 5명은 책훈되었으나, 이빈은 서인의 반대로 다시 제외되었다.

1592년 이빈의 활동

1592년(선조 25) 2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빈을 기복(起復)하여 경상좌도 병마사(兵馬使)에 임명하였는데, 이빈은 어머니의 장례(葬禮)를 아직 치르지 못하였다고 하며 사양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빈에게 형제가 몇 명이냐고 하문하였고, 이빈이 세 명이라고 대답하자, 선조는 “상여(喪輿)를 지킬 사람이 있구나.”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여의 운구(運柩)를 도와주도록 하고, 이빈에게 병마사에 부임하도록 독촉하였다. 이빈이 경상좌도 병마사에 부임하였으나, 이미 경상도 순변사이일(李鎰)이 관군을 이끌고 상주(尙州)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주(敗走)하였으므로, 이빈은 단기(單騎) 필마(匹馬)로, 충주(忠州)로 가서 도순변사(都巡邊使)신립(申砬: 신경준의 아버지)을 도와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싸웠다. 그때 이빈은 이일과 함께 배수진을 치는 것을 반대하고 군사를 나누어 험조처(險阻處)에 매복하였다가 왜적을 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배수진을 칠 것을 고집하고 싸우던 신립은 왜적의 대군에게 포위되자, 부하 장수 김여물(金汝岉: 김류의 아버지) 등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빈이 서울로 돌아오자, 좌의정윤두수(尹斗壽)는 선조에게 “이빈(李薲)에게 죄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경상도 병마사는 김성일(金誠一)로 삼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건의하였으므로, 김성일이 경상좌도 병마사가 되고, 이빈은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 장수로 배속되어, 북상하는 왜적을 임진강(臨津江)에서 저지하였다. 이때 이일은 이양원(李陽元)의 휘하에서 신각(申恪) 등과 함께 한강을 방어하였고, 이빈은 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서 신길(申硈: 신립의 동생)·유극량(劉克良) 등과 함께 임진강을 방어하였다. 그해 4월 그믐날 밤, 선조가 수도 서울을 버리고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몽진(蒙塵: 피난)하고, 그해 5월 5일, 왜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하자, 한강과 임진강의 군사들도 흩어지면서 한강과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당시 이빈은 중위장(中衛將)을 맡고 있었는데, 그 선봉 대장 신길이 왜적의 유인에 넘어가면서 선봉이 무너지자, 여러 장수들이 각기 자기 군사들을 챙겨서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양쪽 군영에서는 명장 이일과 이빈을 믿고 있었으므로, 모두“이일과 이빈이 먼저 배를 타고 도망하였는데, 두 사람이 간곳을 알지 못합니다.”라며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두 사람에게 돌렸다.(『선조실록』 25년 5월 23일) 이에 도원수김명원은 자급(資級)을 강등당하고, 이빈은 월곶진(月串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좌천되었다.

월곶진 첨절제사(月串鎭僉節制使)이빈(李薲)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윤담(尹湛)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전라도 병마사최원(崔遠)을 도와 전라도 앞 바다에서 왜적 2백여 명을 사살하고 수급 92과(顆)를 얻었다. 그 공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이원익(李元翼)의 휘하에서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그해 6월, 선조는 평양을 떠나 의주(義州)로 갔으나, 좌의정윤두수는 평양을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평양의 왕성탄(王城灘)에서 도순찰사이원익과 방어사이빈이 도원수김명원과 함께 왜적의 북상을 저지시키자, 좌의정윤두수는 “김명원은 전의 자급(資級)을 회복시키고, 이원익과 이빈에게도 은전(恩典)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원익을 평안도 감사(監司)로, 이빈을 평안도 병마사(兵馬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세자 광해군은 분조(分朝)를 이끌고 강원도 이천(伊川) 지방으로 나가서 관군과 의병(義兵)을 독려하였는데, 한강 전투에서 패배한 이일은 배를 타고 강원도로 도피하였다가, 세자의 분조에 합류하였다. 그해 7월, 전라 좌수사이순신(李舜臣)은 한산도(閑山島)에서 왜선 1백여 척을 격파하고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그해 8월, 선조는 평안도 감사이원익과 평안도 병마사이빈 등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경들이 힘껏 싸워서 왜적을 섬멸하였으니, 그 노고가 가상하다.”고 하였다.(『선조실록』 25년 8월 1일)

왜군이 마침내 평양을 점령하고, 다시 의주(義州)를 향하여 북상하자, 평양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순안(順安)에서 평안도 병마사이빈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의 북상을 굳게 차단하였다. 순변사(巡邊使)이일도 대군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도착하였으나, 이빈과 이일은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협력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므로, 도원수이원익이 비변사에 건의하여, 도체찰사유성룡(柳成龍)이 두 사람을 통솔하도록 하자고까지 제의하였다. 결국 병마사이빈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홀로 왜적을 공격하다가, 두 번이나 대패하였다. 그해 10월, 체찰사정철(鄭澈)이 병마사이빈의 자급(資級)을 강등시키자, 선조가 이를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때 비변사에서는 “이빈이 경솔하게 진격했다가 패전하였으니, 벌을 당연히 받아야 하겠으나, 체찰사가 병마사의 자급을 마음대로 깎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회계하니, 선조가 이빈의 자급을 회복시켰다. 그때 경상도 진주 목사(晉州牧使)김시민(金時敏)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왜적을 대파시키고, <진주(晉州) 대첩(大捷)>을 이루었다. 그해 11월, 비변사에서 “병마사이빈은 오직 수비만을 일삼을 뿐이지만, 순변사이일(李鎰)은 세자를 도와서 전공(戰功)이 많으니, 이빈을 병마사에서 파직하고 이일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일을 평안도 병마사로 삼고, 이빈을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시켰다.(『선조실록』 25년 11월 16일)

1593년 이빈의 활동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을 수복할 당시 비변사에서는 이빈(李薲)에게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평양성(平壤城) 탈환에 맞추어 관군을 이끌고 먼저 험지를 점령한 후, 왜적의 공격으로 부터 명나라 군사를 지켜주도록 하였다. 명나라 군사들이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해자의 수렁에 빠져나오지 못하자, 이빈은 90여 명의 궁수(弓手) 부대로 하여금 왜적에게 화살 공격을 퍼부어 왜적이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명나라 군사들이 마침내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할 수 있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이빈의 궁수 부대를 신통하다고 극구 칭찬하자, 선조는 이빈을 다시 평안도 병마사(兵馬使)로 삼고, 이일을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시켰다.

그해 2월, 병마사이빈이 이일을 대신하여 순변사(巡邊使)로 임명되었다. 관군과 명나라 군사는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일제히 남하(南下)하였는데, 명나라 제독 이여송 부대가 파주(坡州)의 벽제관(碧蹄館)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았다. 명나라 선봉 부대가 패배하자, 제독 이여송은 군사를 모두 거두어서 퇴각하려고 하였다. 순변사이빈은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 등과 함께 제독 이여송에게 퇴각하지 말고 형세를 보아 가며 다시 진군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여송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결국 군사를 퇴각시켰다. 그때 옆에 있던 명나라 총병(總兵) 장세작(張世爵)은 극력 항의하는 순변사이빈을 발로 걷어차기까지 하였다.[비문] 당시 명나라에서는 병부 상서석성(石星)이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장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와 강화(講和) 회담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해 3월,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이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탈환할 때, 순변사이빈은 도체찰사유성룡의 명령을 받고 권율과 함께 군사를 연합하여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 3만 명을 격파하고 <행주(幸州)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마침 3월에 명나라 심유경(沈惟敬)과 일본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사이에 강화(講和) 조약이 성립되면서, 그해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였으므로, 그해 5월, 서울이 수복되었다. 순변사이빈은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경상도 상주(尙州)와 전라도 남원(南原) 등지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상대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경상우도와 전라좌도 사이를 오가며 수십 차례 왜군과 싸워서 그들을 물리치고, 운봉(雲峰)의 팔량치(八良峙)를 굳게 지켜 왜적이 전라도로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 이때 그는 명나라 군마에 공급할 콩을 전쟁을 피하여 떠돌던 기민(饑民) 2천여 명을 구제하는데 우선 쓰도록 하여 그 목숨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싸움을 피하여 도망한 병사 1천 5백 30여 명을 받아들여, 명나라 군사에게 공급할 군량미를 신속하게 옮기도록 조처하였다. 그때 순변사이빈은 경상도 의령(宜寧)에 군사를 주둔하고 장병을 훈련시켰는데, 흩어졌던 관군과 의병들이 모두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또 이빈에게 투항하는 왜군도 많았는데, 그는 왜군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각 군영에 배속시켜 통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명나라와 강화(講和) 조약을 맺고 철수하던 왜군들이 진주(晉州)로 일제히 집결한 후, 그해 5월 진주성을 총공격하면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5만여 명의 진주 사람들이 모두 옥쇄(玉碎)하였다. 이때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은 스스로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나, 제1차 진주성 싸움에 참여하였던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과 명나라 군사들은 왜군에 의해 길이 막혀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진주와 가까운 의령에 주둔하였던 순변사이빈은 스스로 장계(狀啓)를 올려서,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한 죄를 처벌하여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 이빈을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시켰다.

그해 10월, 사헌부에서 이빈을 탄핵하기를, “중추부 동지사이빈(李薲)은 본래 재략이 없는 사람으로 후퇴하여 도망하는 일만 일삼는데, 일찍이 임진강을 지킬 때에는 왜적을 보자 배를 타고 먼저 도망하였고, 진주성이 함락될 때에는 끝내 달려가서 성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전후로 군율을 범한 죄가 진실로 한두 번이 아닌데도 그의 목을 베지 않고 살려둔다면, 장차 군사 기율을 진작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이빈은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만, 당초 현지의 형세가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없는데다가, 지금 왜적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 그를 잡아 온다면, 갑자기 사기(事機)가 변할까 걱정됩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우선 자급(資級)을 강등시키고 대죄거행(戴罪擧行: 죄를 우선 유보하고 그대로 직무를 보게 하는 것)하도록 하고, 후일에 전공을 세우는 것을 보아가면서 천천히 죄를 논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선조가 이빈의 자급(資級)을 강등시키도록 명하였다.(『선조실록』 26년 10월 28일) 순변사이빈은 군사를 움직이는 데에 아주 신중하였고, 싸울 때에는 복병을 매복시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전공을 포상할 때에는 휘하의 여러 장수들과 명나라 장수들에게 전공을 돌리고, 자기 자신은 항상 포상에서 빠졌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빈을 무능한 장수로 취급하였다.

그해 12월, 선조가 비변사 대신들을 인견하고, 좌의정윤두수(尹斗壽)에게 “장사(將士) 가운데 싸움에 능한 자가 있는가. 변장(邊將)과 수령(守令)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하고 물으니, 좌의정윤두수가 “한명련(韓明連)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권희인(權希仁)도 잘 싸운 사람인데 적탄을 맞아 죽었고, 이빈(李薲)의 군사 90여 인이 전투에 익숙하다고 들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역전의 용사였던 이빈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18명을 선발할 때, 서인의 반대로 공신에 책훈되지 못하였으나, 비변사 대신들조차 이빈의 군사 가운데 90여 명의 궁수(弓手)가 왜적과 싸우는 데에 뛰어난 사수(射手)라고 칭찬하였다.(『선조실록』 26년 12월 3일)

1594년 이빈의 활동

1594년(선조 27) 1월, 대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경기 수사(水使)이빈(李鬢)도 전염병에 걸렸으나, 왜적 토벌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이빈이 병을 무릅쓰고 왜적을 토벌하여 많은 수급(首級)을 바쳤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지만 지난번 패전한 죄 때문에 삭감된 자급(資級)을 서둘러 회복시켜 주기는 어렵다. 후에 전공을 세울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였다. 그해 2월, 이빈은 군영(軍營)에서 어머니의 3년 상례(常禮)를 마친 후, 자신의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고 의원(醫員)과 약물을 보내어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왜적과 상대하여 싸운 지 벌써 3년이나 되었으니, 군사들이 안이한 생각에 젖을 수 있고 백성들도 상당히 해이해질 수 있다. 경(卿)이 돌아다니며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효유(曉諭)하여 안이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기필코 왜적을 섬멸하도록 독려하라.” 하였다.

그해 2월, 경기 수사이빈이 경내에 거느리고 있는 장병이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장기간의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군량미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에 이빈은 경기 수영(水營)을 대정도(大靜島)로 옮기고 둔전(屯田)을 개척하여 군민(軍民)의 식량을 해결할 방책을 계청(啓請)하니,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그는 떠돌아다니던 백성들을 섬으로 불러 모아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도록 권장하였는데, 수사이빈이 앞장서서 둔전을 경작하면서 군량미를 마련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여,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한편 섬의 백성들 가운데 건장한 사람을 뽑아 수군(水軍)으로 편성하여 훈련을 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노역(櫓役)에 종사하도록 하면서, 경기의 수군이 전일보다 배로 증가하게 되었고, 전선(戰船)도 더욱 많이 만들면서, 왜선(倭船)을 철저하게 방비할 수 있게 되었다.(『선조실록』 26년 12월 16일)

그해 3월, 이빈이 경상도 순변사(巡邊使)가 되었다. 그때 김해(金海)와 웅천(熊川)에 주둔하고 있던 적장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군대가 서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막기 위하여 순변사이빈(李薲) 등은 의령(宜寧)을 지키고 있었고,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하고 있던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군대가 북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막으려고 경상좌도 병마사고언백(高彦伯) 등이 경주에서 왜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 장수들의 관직과 관품이 서로 대등하였는데 각기 호령(號令)을 마음대로 하였을 뿐 아니라, 서로 협력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진격할 때 함께 진격하지 않고, 패하더라도 서로 구원하여 주지 않았다.(『선조실록』 27년 3월 30일) 당시 각진(陣)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었는데, 순변사이빈도 부임하자마자 다시 전염병에 걸렸다.

그해 10월,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경상우도 순변사이빈(李薲)에게 ‘창원부(昌原府)에서 만나보자.’고 편지로 협상을 제의하여 왔다. 이에 비변사(備邊司)에서는 경상우도 병마사김응서(金應瑞)를 창원으로 파견하였고 코니시 유키나카와 협상을 통하여, 서로 잠정적으로 싸우지 않고 평화를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은 우병사(右兵使)김응서에게 코니시 유키나카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항복하도록 권유하면서 그의 의향을 떠보도록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이빈(李薲)은 이때 임의로 왜적의 진영에 격서(檄書)를 보냈는데, 이 격서에 왜적이 보내온 답서는 그 내용이 오만하고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선조는 “막중한 일에 도원수의 처사가 어찌 이처럼 경솔한가. 코니시 유키나카 등이 어찌 우리나라에 투항할 리가 있겠는가. 이빈의 격서(檄書)에 답한 내용을 보면 저들의 오만한 태도가 더욱 심하니, 그 격서가 극심한 모욕을 부른 셈이다.” 하고, 진노하였고, 이빈의 격서가 극심한 모욕을 자초하였다고 하여. 그를 파직하였다.(『선조실록』 27년 11월 8일)

삼수병(三手兵) 제도와 이빈의 궁수(弓手) 부대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인 으로부터 서양 근대의 발달된 총포술을 배운 일본에서는 조총(鳥銃)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총포술이 전해지지 못한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 활과 창·칼과 같은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 조총을 사용하는 왜군과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던 병마사이빈은 <임진왜란> 때 부하 가운데 활을 잘 쏘는 90여 명의 궁수(弓手)를 선발하여 편전(片箭) 쏘는 법을 훈련시켰다. 편전은 세종 때 개발된 활로서, 재래식 활 가운데 가장 성능이 우수하였는데, 화살이 수백 보(步) 이상을 날아가 철갑을 꿰뚫을 수 있었으므로, 그는 편전(片箭)을 사용하는 궁수(弓手) 부대를 조직하여 <임진왜란> 때 일본의 조총과 상대하여 싸워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선조 26) 1월, 선조는 의주(義州)에서 비변사 대신들을 인견(引見)하고, 좌의정윤두수(尹斗壽) 등과 함께 평양(平壤)을 수복할 방책을 논의하였다. 이때 선조가 “옛날부터 군사의 형세가 서로 상대가 되지 않을지라도 전쟁에서는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지는 법인데, 지금 우리 군사는 왜놈들과 싸울 때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반드시 패배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자, 좌의정윤두수가 “왜놈들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싸우는 훈련된 군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명나라 군사를 안내하던 찬성윤근수(尹根壽: 윤두수의 동생)는 “평양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들이 해자의 진흙탕 수렁에 빠져서 헤매고 있었는데, 함께 싸우던 이빈(李薲)의 군사가 왜적을 향하여 활을 쏘기만 하면 모두 명중시켰으므로, 성안의 왜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명나라 사람들이 감탄하기를, ‘이와 같은 신통한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왜적이 평양에까지 쳐들어오게 하였는가.’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사실로 미루어 이빈의 궁수(弓手) 부대가 일본의 조총(鳥銃)을 상대해 얼마나 잘 싸웠는지 알 수 있다.

명나라 군사와 우리 관군이 평양을 수복한 뒤,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柳成龍)이 명나라 군영으로 찾아가 요동(遼東) 출신의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중국 남방 출신의 명나라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등을 만났는데, 명나라 참장 낙상지는 도체찰사유성룡에게 “조선의 군대는 아주 미약한데, 왜적이 영토 안에서 날뛰고 있으니, 이런 때에는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명나라의 총포술과 무술을 조선 군사들에게 교습시키면, 조선 군대가 수년 안에 정예 부대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왜적의 군사도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충고하면서,[『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2] 조선에서 요청하기만 한다면, 자기 부대의 포수(砲手)들을 조선 군대가 주둔한 평안도 안정(安定)으로 보내 총포술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의하였다.

도체찰사유성룡은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돌아와 선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선조는 비변사 대신들에게 “명나라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의 포수(砲手)를 평안도 안정(安定)으로 초치하여 우리나라 군사들에게 총포술을 가르치게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나라 군사들이 압록강을 넘어가서 명나라의 칼 쓰는 검법(劍法)을 배우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고 물으니, 병조 판서이항복(李恒福)은 “우리나라 군사들은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반대하였다. 전쟁 중에 있는 군사들에게 총포술과 검법을 가르쳐서 당장 싸움에 써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찬성윤근수(尹根壽)는 “포수가 당장 싸움터에 나가서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명나라 포수를 평안도 안정으로 초치해서 우리나라 군사들에게 가르치도록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서양의 총포술과 중국의 검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조는 “포수를 반드시 초청해야 한다. 검술(劍術)은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이지만,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 중국의 검법이 전해진다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선조실록』 25년 9월 17일)

선조의 명령을 받은 도체찰사유성룡은 금군(禁軍) 한사립(韓士立)으로 하여금 젊은 군인 70여 명을 모집하여 명나라 참장 낙상지 부대로 가서 총포술과 검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낙상지는 부하 장육삼(張六三) 등을 뽑아 교관으로 삼고, 서양의 총포술과 중국의 곤봉(棍棒)·등패(籐牌)·낭선(狼筅)·장창(長鎗)·당파(鐺鈀)·쌍수도(雙手刀) 등의 창검술을 조선의 군사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먼 거리에서 전투 할 때 필요한 서양의 총포술을 익히는 자를 포수(砲手)라고 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接戰)할 때 필요한 중국의 검법을 익히는 자를 살수(殺手)라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중간 거리에서 싸울 때 필요한 무기는 일본의 조총(鳥銃)과 조선의 편전(片箭)이 있었으므로, 도체찰사유성룡은 먼 거리에서의 전투에 필요한 포수(砲手)와 가까운 거리의 살수(殺手)에다가, 중간 거리의 궁수(弓手) 부대를 사수(射手)로 추가하여, 마침내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을 조직하였다. 포수(砲手)는 순변사이일로 하여금 금군(禁軍) 중에서 2백 명을 뽑아 훈련하게 하였으며, 사수(射手)는 병마사이빈의 사수(射手) 90여 명으로 하여금 금군에게 궁술(弓術)을 가르쳐 양성하도록 하였다. 또 살수(殺手)는 방어사조경(趙儆)을 명나라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에게 보내어 체계적으로 창검술(槍劍術)을 배워서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있던 무관(武官)이나 금군(禁軍) 등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3년(선조 26)8월, 선조는 서양의 총포술과 중국의 검법을 군사들에게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하고, 그 사목(事目)을 정하였다. 훈련도감의 편제는 영(營)-사(司)-초(哨)-대(隊)로 구성되었는데, 포수와 살수는 사(司)에 소속되었다. 훈련도감에 좌영(左營)·우영(右營)을 설치하고, 이일과 조경을 각기 그 대장에 임명하였다. 좌영 대장이일은 포수를 주로 훈련시켰으며, 우영 대장조경은 창검술의 훈련을 전담하였다. 서인의 영수인 좌의정윤두수(尹斗壽)가 초기에 그 사무를 관장하다가, 얼마 후, 동인의 영수인 도체찰사유성룡이 관장하였는데, 조선의 궁수(弓手)를 사수(射手)로 추가하면서, 이른바 <삼수병(三手兵) 체제>가 완성되었다. 사수(射手)는 수문장(守門將)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그 이유는 수문장이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었다. 유성룡은 <삼수병>을 선발할 때, 응모자에게 큰 돌을 들고 한 길 이상 되는 담장을 뛰어넘게 하여,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장한 사람만을 골라서 뽑았는데,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달에 삼수미(三手米)를 6두(斗)씩 월료(月料)로 지급하는 등 파격적으로 대우하였다. 즉 삼수병은 종래의 개병제(皆兵制)에서 벗어난 일종의 모병제(募兵制)였다. 군사를 모집한지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의 <삼수병>을 얻게 되었는데, 중국식의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을 두어 <삼수병>을 통솔하게 하였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평양(平壤)을 수복하였을 때, 선조가 명나라 군영으로 찾아가 이여송에게 사의(謝意)를 표하면서 “명나라 군사가 처음에는 패전하였으나 나중에 승리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제독 이여송은 “처음에 왔던 중국 북방 출신의 장군들은 항상 말을 타고 북방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만 익숙하였기 때문에, 배를 타고 왜적과 싸우는 데 불리하였으나, 지금의 남방 출신의 장군들은 작전을 세울 때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왜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전승(全勝)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선조는 비밀리에 역관(譯官)을 시켜 그 책을 이여송의 부하에게서 구입하여 도체찰사유성룡에게 보여주고 이 방법에 따라 왜적을 방어할 방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였다. 유성룡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종사관(從事官)이시발(李時發) 등과 함께 강해(講解)하고 서로 토론하는 한편, 유생(儒生) 한교(韓嶠)를 담당 낭관(郎官)으로 삼아 의심나는 부문이 있으면 명나라 장수들에게 질문하도록 하였는데, 사수(射手)·포수(砲手)·살수(殺手)의 3수(三手) 체제를 완성하고, 그 기술을 부문 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연습하면서, 척계광의 이론에 따른 <삼수병> 제도가 불과 몇 달 만에 우리나라에서 실행되었다.[『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임진왜란>은 조선 전기에서 조선 후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군사제도는 조선 전기의 <오위제(五衛制)>에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 후기에는 <삼수병(三手兵)>과 <5군영(軍營)>으로 바뀌었다. 전쟁무기도 임진왜란 전에는 활이 주된 무기였으나, 왜란 이후에는 총포(銃砲)로 전환되었다. 포수(砲手)를 중심으로 조직된 훈련도감은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건장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하루에 삼수미(三手米) 2되를 지급하였는데, 이는 모병제인 직업 군인 제도였다. 삼수병의 규모는 처음 선조 때에는 1,000명 내외였으나, 1809년(순조 9)에 편찬한 『만기요람』에 의하면 포수는 2,440명, 살수는 738명으로 증가하였다. 훈련도감의 편제도 확대되어 2사(司)에서 5사로 늘어났고, 1사(司)는 3초(哨)에서 5초로 늘어났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는 <훈련도감>의 삼수병에게 지급할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삼수미(三手米)를 거두게 되면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선조 때 배워온 명나라의 검법(劍法)은 효종 때 <북벌(北伐)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장려되면서, 더욱 다양하게 발달하였는데, 정조 때 이르러 창검법을 정리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선조는 훈련도감 낭관한교(韓嶠)로 하여금 명나라 유격(游擊) 허국위(許國威)에게 검법(劍法)을 자세히 물어 오도록 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곤봉(棍棒), 등패(籐牌), 낭선(狼筅), 장창(長槍), 당파(鏜鈀), 쌍수도(雙手刀) 등 6기(技)를 편찬한 『무예보(武藝譜)』를 간행하였다. 영조 때에는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劒),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劒), 권법(拳法), 편곤(鞭棍) 등 12기의 다양한 창검법(槍劍法)을 보완하고 도해(圖解)를 붙여서 『신보(新譜)』를 간행하였다. 정조는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등에게 기창(騎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원기(猿騎) 등 말을 타는 6기(技)를 추가한 총 24기(技)를 정리하도록 명하였다. 1790년(정조 14)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편찬 간행되었는데, 정조가 직접 서문을 지었다. 『무예도보통지』가 간행되자 정조는 이를 각 군영에 나누어주어, 군사들에게 창검법을 익히도록 하였다.[『국조보감』 73권]

성품과 일화

성품이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았다.[행장]

이빈(李薲)이 어렸을 때, 솔개가 집에서 키우던 닭을 채간 적이 있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이빈은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긴 채, 손바닥 위에 고깃덩이를 올려놓고 솔개를 기다렸다. 솔개가 다시 날아와 고깃덩이를 낚아채는 순간, 이빈은 솔개의 두 발을 손으로 잡아 당겼다. 솔개가 발톱으로 이빈의 손을 할퀴는 바람에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그는 솔개를 놓지 않고 제압하여 마침내 사로잡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모두 놀라고 신통하게 여겼다.[비문] 이빈이 지방의 수령관으로 있을 때 보검(寶劍) 하나를 얻었는데, 대신(大臣)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보검을 가지고 싶어 하였다. 어떤 대신이 이빈에게 사람을 보내 보검을 팔라고 청하자, 이빈은 “나는 장수이다. 어떻게 보검을 가지고 권귀(權貴)에게 아첨할 수 있겠는가.” 하며 거절하였다. 수령관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온 이빈은 선조에게 그 보검을 바쳤다.[행장]

이빈은 아버지 서흥 부수(瑞興副守)이춘억(李春億)과 어머니 상산김씨(商山金氏) 사이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1537년(중종 32) 충청도 옥천(玉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무술(武術)을 연마한 후, 1570년(선조 3) 무과(武科)에 급제하면서, 무관(武官)으로 진출하였다. 이빈은 걸출하고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동인(東人)측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병사(兵使)가 될 만한 인물로는 이빈을, 수사(水使)가 될 만한 인물로는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빈은 빛나는 공훈을 세웠으나, 서인의 천거를 받은 이일(李鎰)에 의하여 항상 견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부침(浮沈)을 거듭하였다. 당파싸움에 휘말린 이빈과 이일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 제 각각 군사를 움직였기 때문에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고, 공격보다 방어가 많았다. 더욱이 세자 광해군이 분조(分朝)를 이끌고 강원도에서 의병(義兵)과 관군을 지휘하며 활동할 때에는 분조의 분(分) 비변사(備邊司)에 속한 이일이 본조(本朝)의 비변사(備邊司)의 지휘를 받던 이빈과 항상 대립각을 세우며 협력을 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9월 선조가 비변사(備邊司)의 대신들을 인견하고 이빈과 이일의 갈등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좌의정윤두수(尹斗壽)는 “우리 군사들이 평양의 서쪽 순안(順安)에 주둔한 지도 오래인데다가, 추운 계절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나태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공격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면, 우리 군사들이 모두 지칠 것이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병마사이일(李鎰)과 순변사이빈(李薲)이 서로 견해가 달라서 대립각을 세우고 협력하지 않고 있으니,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선조가 “모두의 의견은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윤두수는 “도원수이원익의 서장(書狀)을 보면, 다른 재상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통제하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가 “도원수의 생각은 어떠하던가. 공격하여 싸우고자 하던가.”하고 묻자, 윤두수는 “이일·이빈 두 장군의 군대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있어서 공격을 미루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 두 사람 모두 잘못이다. 이러한 시기에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라며 탄식하였다.(『선조실록』 25년 9월 17일)

좌의정윤두수는 “여기 본조(本朝)에서도 미처 주선하지 못할 일이 있는데 동조(東朝: 분조)의 신료 가운데 분(分) 비변사(備邊司)의 사람들은 이일(李鎰)이 동조에서 파견된 장군이라고 하여 이일을 편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대사헌이덕형(李德馨)은 “분 비변사에서는 이일을 옳다고 편들고 있으나, 순안에서 협력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라고 하니, 선조는 “본조의 비변사에서도 동조(東朝)의 여러 신료들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고 물었다. 병조 판서이항복(李恒福)은 “대체로 관계없는 일들입니다.” 하였다. 이에 선조는 “풍원군(豊原君)유성룡(柳成龍)을 시켜 두 장군을 통제하게 하고자 하는데⋯” 하니, 윤두수가 “풍원군을 시켜 나아가서 독전(督戰)하게 하면서 두 장군 사이의 형세를 보아가며 화해 협력시켰으면 합니다. 군병을 수습한 것은 이빈의 공로이고, 인심을 안집시킨 것은 이원익(李元翼)의 공로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가 “풍원군유성룡으로 하여금 통제하게 한다는 뜻을 분 비변사에 알려서, 이빈과 이일을 화해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만일 유지(諭旨)를 내린다면, 형색(形色)이 너무 분명해질 것이니, 유지를 내리기에 앞서 두 장군을 무마해서 서로 협력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선조실록』 25년 9월 17일)

1593년(선조 26) 12월에 선조가 순무어사(巡撫御史)서성(徐渻)의 보고를 받고 “경상우도는 군사가 2만 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충분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경상도 순변사(巡邊使)이빈(李鬢)은 “신이 거느린 장수와 사졸(士卒)은 수천 명도 채 못 되는데다가, 각각 고립되어 서로 구원해주지 못하는데, 이것이 우려됩니다.” 라며 곧바로 그 보고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이빈은 또한 “해당 관부에서 도망친 장수와 사졸들을 성실히 찾아서 부대로 귀속시키지 않고 있는데, 군사 없는 장수가 무슨 싸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군현(郡縣)의 문관 수령과 수륙을 지키는 무관 장수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문관과 무관이 서로 다른 계통에서 명령을 받는데, 이로 말미암아 당사자들 간에 불협화음이 많이 발생합니다.”라고 고충을 상언(上言)하였다. 이빈이 <임진왜란> 때 명장 이일(李鎰)과 함께 수륙을 지키는 무관으로서 얼마나 현지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파주(坡州)의 선영(先塋)에 있고,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행장] 손자 이진(李榗)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되면서,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었다.[행장]

금남군(錦南君)정충신(鄭忠信: 1576~1636)이 이빈의 막하(幕下)에서 가장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이빈이 돌아간 직후, 그가 행장을 지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유실되고 말았다. 이빈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지나자, 이빈의 증손자 이상징(李商徵: 이환의 아들)은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그 사적이 영영 인멸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집안에 소장된 묵은 초고(草稿)를 수습하여 증조부 이빈의 행적을 대강 기록한 후, 소론(小論)의 영수인 윤증(尹拯)에게 “후세에 전할 근거를 마련하여 주기를 바랍니다.”하며 행장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윤증이 지은 이빈의 행장을 보면, 자료가 부족하여 <임진왜란> 때 이빈이 세운 빛나는 무공(武功)을 빠뜨린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지금 필자가 <실록>의 사료에 의하여 <임진왜란 때 초기 3년 동안 이빈의 활동>을 보충하였다.

윤증은 이빈의 행장에서 “선조 말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녹훈할 때, 이빈은 공신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다만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이 이빈의 무공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임진왜란> 당시의 사실을 기록하면서 ‘임진왜란 이후의 여러 장수 중에서 오직 이빈이 신하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하였고, 또 이빈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만시(輓詩)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고 하였다.[행장] 그러나 서인의 영수였을 뿐만 아니라, 공신도감 당상관(堂上官)이었던 백사이항복이 자신을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장인인 권율은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이 되어, 사위와 장인이 모두 1등 공신으로 책훈되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패전한 원균(元均)을 이순신(李舜臣)과 나란히 1등 공신으로 책훈한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비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부인 청주곽씨(淸州郭氏: 1548~1627 =80세)는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곽원충(郭元忠)의 딸이다. 자녀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이원영(李元英)은 직장(直長)을 지냈고, 차남 이광영(李光英)은 강화 부윤(江華府尹)을 지냈다. 측실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서자 이진영(李鎭英)은 첨지(僉知)이고, 사위는 판관(判官)이덕연(李德演)과 박신태(朴信泰)이다. 손자 이항(李杭)은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냈고, 손자 이진(李榗)은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고, 손자 이환(李桓)은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을 지냈는데, 모두 강화 부윤이광영(李光英)의 아들이다.[행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재유고(明齋遺稿)』
  • 『고대일록(孤臺日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난중잡록(亂中雜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서애집(西厓集)』
  • 『기언(記言)』
  • 『약천집(藥泉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