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중(朴弘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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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2년(선조 15)~1646년(인조 24) = 65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 등을 지냈다. 자는 자건(子建)이고, 호는 추산(秋山)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박희룡(朴熙龍)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교관(敎官)신복경(申福慶)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참의(參議)를 지낸 박호겸(朴好謙)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당시의 명사들인 이정구(李廷龜) · 이식(李植) · 이항복(李恒福) · 서성(徐省) · 김상헌(金尙憲)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박홍중(朴弘中)은 1600년(선조 3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참봉(參奉)과 사산현감(四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사화(癸丑士禍)>가 일어나자 김제남(金悌男) · 이원익(李元翼) · 남이공(南以恭) · 정택뢰(鄭澤雷) 등을 변호하고, 폐모론(廢母論)을 일으킨 이이첨(李爾瞻) · 윤인(尹訒) · 정조(鄭造) · 이위경(李衛卿) 등의 탄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무옥(誣獄)으로 판명되면서, 인조 때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그는 풍수(風水)에 뛰어나서, 1630년(인조 8) 3월 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이정구와 함께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을 살피기도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8년 3월 14일] 그리고 이듬해인 1631년(인조 9) 10월에는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9년 10월 10일] 저서로는 『추산집(秋山集)』이 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계곡집(谿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