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대(高聖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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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16년(순조 16)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인으로, <을해박해(乙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정조~순조 시대 활동

‘여빈’이라고도 불린 고성대(高聖大)는 충청도 덕산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동생 고성운(高聖云)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전북 고산 저구리(현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01년(순조 1)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 이때 그는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자신의 천주교 신앙을 고수하였으나, 얼마 후 생명에 위협을 느껴 배교를 약속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배교를 후회하며 동생 고성운과 함께 경상도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으로 이주하여 인근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다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순조 15) 경상도와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을해박해가 발생하면서, 고성대는 노래산 교우촌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진영(慶州鎭營)에 끌려간 후 취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였다. 이에 고성대를 비롯하여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은 다시 대구에 있던 경상도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도 계속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순조실록』 15년 6월 18일),[『일성록』순조 15년 6월 19일]

고성대는 그해 10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일성록』순조 15년 10월 18일],[『승정원일기』순조 15년 10월 18일] 1년이 지난 1816년(순조 16) 11월 1일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다.[『일성록』순조 16년 11월 8일],(『순조실록』16년 11월 8일) 이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1817년(순조 17) 3월 2일(양력)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당시 사망한 다른 천주교인들의 유해와 함께 거두어져 무덤 4개로 나뉘어 안장되었으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성품과 일화

고성대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성대는 본래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으나 신앙생활을 한 이후 성격이 바뀌며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동생 고성운과 함께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등 효성을 다하였다.[『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http://www.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