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빈박씨(䄙嬪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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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03년(숙종 29) = ?].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肅宗)의 후궁.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박효건(朴孝健)이며, 다른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숙종의 후궁

박명빈(朴明嬪)은 본래 상궁(尙宮)이었다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후 10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회임을 계기로 숙원(淑媛)에 봉해졌다.(『숙종실록』 24년 11월 4일) 이듬해 단종(端宗) 복위를 기념하여 숙의(淑儀)로 승급되었으며,(『숙종실록』 25년 10월 23일) 1701년(숙종 27) 귀인(貴人)에 올랐다.[『승정원일기』숙종 27년 3월 23일]

1702년(숙종 28) 다시 정1품 명빈(䄙嬪)에 올랐으나,(『숙종실록』 28년 10월 18일),[『승정원일기』숙종 28년 10월 19일] 이듬해인 1703년(숙종 29) 세상을 떠났다. 박명빈이 사망하자 숙종은 장례를 예장(禮葬)으로 거행하라 명하며 제수(祭需)를 넉넉히 주고 관판(棺板) 한 벌도 잘 골라 보내라고 명하였다.(『숙종실록』 29년 7월 15일) 그러나 좋지 못한 관판이 가게 되자 숙종은 해당 관원을 체포해 심문하며 사대부가의 목재까지라도 찾아서 품질이 좋은 목재를 즉시 보내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숙종 29년 7월 16일],[『승정원일기』숙종 29년 7월 17일] 이후 시독관(侍讀官)이만성(李晩成)이 박명빈의 예장을 잘못 치룬 관원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였으나 숙종은 오히려 이만성을 파직하고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숙종실록』 29년 8월 7일),(『숙종실록』 29년 8월 8일) 또한 숙종은 박명빈의 초상을 주관하고 방제(旁題)에 아명(兒名)을 넣을 수 없다 하여 아직 5세로 어렸던 박명빈이 낳은 아들을 연령군(延齡君)에 봉하였다.(『숙종실록』 29년 9월 3일),[『승정원일기』숙종 29년 9월 3일]

묘소와 후손

박명빈의 무덤은 본래 금천현 번당리(衿川縣 樊塘里 :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실시한 경성부 구획정리로 인하여 1940년 아들 연령군의 묘와 함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명빈은 숙종과의 사이에서 1남 연령군이훤(李昍)을 두었다. 연령군은 5세였던 1703년 어머니 박명빈을 여의었는데, 숙종은 대개 6세 때 봉군(封君)하는 법을 어기고 방제에 넣어야 한다며 그를 연령군에 봉하였다. 이때 많은 신하들이 숙종의 뜻에 반대를 표하였으나, 숙종은 반대하는 신하를 처벌하면서까지 이 일을 강행하였다.(『숙종실록』 29년 9월 3일),[『승정원일기』숙종 29년 8월 27일],[『승정원일기』숙종 29년 9월 3일] 연령군은 1701년(숙종 33) 김동필(金東弼)의 딸과 혼인하였고,(『숙종실록』 32년 12월 10일),(『숙종실록』 33년 2월 6일) 1719년(숙종 45) 세상을 떠났다.(『숙종실록』 45년 10월 2일)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보궐정오(肅宗補闕正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문화유적분포지도 : 예산군』, 충청남도,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