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몽(金禮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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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6년(태종 6)~1469년(예종 1) = 64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예종(睿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공조 판서(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경보(敬甫)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김소(金遡)이고, 어머니는 조신우(趙臣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화(金華)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김석재(金碩材)이다.

세종~예종 시대 활동

1429년(세종 11) 생원시를 거쳐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에 제수되었다.[『국조방목(國朝榜目)』] 그 뒤 집현전 저작랑(著作郎)을 거쳐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으며, 1440년(세종 22)에는 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狀官)부사직(副司直)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2년 5월 19일) 1445년(세종 27)에는 집현전 부교리(副校理)로서 왕명을 받아 집현전 저작랑유성원(柳誠源), 사직(司直)민보화(閔普和) 등과 함께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7년 10월 27일) 1447년(세종 29)에는 집현전 교리(校理)가 되었고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는데, 아들 김덕원(金德源)도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므로, 아들과 함께 유가(遊街 : 과거 급제자가 좌주(左注)와 선진자(先進者), 친척들을 찾아보기 위해 풍악을 울리며 시가를 행진하던 일)하면서 그 명성이 더욱 빛났다. 또한 사관(史官)을 역임하며 『고려사(高麗史)』 개찬 문제를 놓고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양성지 등과 논의를 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1년 2월 5일)

문종(文宗) 대에는 세자의 서연(書筵)에 참여하였으며, 1452년(문종 2)에는 이석형(李石亨), 이예(李芮) 등과 함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에 참여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문종실록』 2년 2월 20일) 단종(端宗) 대에는 사헌부 집의(執義)와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호조 참의(參議)에 올랐다. 그 뒤 1460년(세조 6)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정사(謝恩正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가서 조선의 자제를 명나라 학교에 입학시켜 줄 것을 주청(奏請)하였다.(『세조실록』 6년 5월 11일) 이듬해인 1461년(세조 7)에는 왕명으로 양성지(梁誠之),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언문으로 번역하였으며, 1467년(세조 13)에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으로서 정인지(鄭麟趾), 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왕명에 따라 『서경(書經)』의 구결(口訣)을 교정하였다.(『세조실록』 7년 8월 27일)

김예몽은 특히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성균관 대사성을 겸할 때에는 매번 제생(諸生)의 제술(製述)을 시험 봐서 우등한 사람에게 반드시 포장(褒奬)을 주며 권장하여 성취(成就)하게 하였다.(『예종실록』 1년 10월 18일) 1469년(예종 1) 10월 18일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1일 간 철조(輟朝)를 하고, 조문을 하는 동시에 부의하고 전(奠)을 올렸다.(『예종실록』 1년 10월 18일)

성품과 일화

김예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으로 이름이 높았다. 과거의 고관(考官)이 되어 진사(進士) 신숙주(申叔舟) 등을 뽑았는데, 이때부터 항상 지공거(知貢擧)로서 책시(策試)하였던 선비들이 연달아 재상과 달관(達官)이 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사람을 명확하게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다’고 하였다.

어느 날 김예몽은 같은 동네에 사는 문안공(文安公)이석형(李石亨)과 마주앉아 장기를 두었다. 곧이어 서거정이 중추부사(中樞府事)송처관(宋處寬)과 함께 도착하였는데, 장기판이 이미 종반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 당시 재상에 마승(馬勝)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고, 관원 중에 차유(車有)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 서거정이 보니 이공은 말[馬] 둘이 있어 힘이 강하고, 김공은 차(車) 하나가 있으나 세가 약하였다. 그러자 서거정이 “마승(馬勝 : 말이 우세하다) 하지 않겠느냐” 하니, 김예몽이 받아 말하기를, “나는 차유(車有 : 차가 있다)가 아니냐” 하여, 서로 크게 웃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필원잡기(筆苑雜記)]

묘소와 후손

김예몽의 묘소는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에 위치해 있다. 이는 조선시대 기준 충주목 북쪽 30리이다.

첫째 부인 조씨(曹氏)는 조육안(曹陸安)의 딸로 2남 1녀를 두었으며, 둘째 부인 조씨(趙氏)는 조수종(趙秀宗)의 딸로 자식이 없었다. 1남 김덕원은 현감(縣監)을 지낸 허훈(許薰)의 딸에게 장가들어 통훈대부(通訓大夫)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으나, 후사 없이 아버지 김예몽보다 먼저 죽었다. 2남 김성원(金性源)은 통훈대부 성균관 사예(司藝)로 정계소(鄭繼韶)의 딸에게 장가들어 7남을 낳았는데, 맏이 김백문(金伯文)은 태학(太學)에 들어갔고, 둘째 김중문(金仲文)은 김덕원의 후사가 되었다. 1녀는 별제(別提)유개동(柳介同)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필원잡기(筆苑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