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지남(練兵指南)
| 주요 정보 | |
|---|---|
| 대표표제 | 연병지남 |
| 한글표제 | 연병지남 |
| 한자표제 | 練兵指南 |
| 분야 | 군사/국어 |
| 유형 | 문헌 |
| 지역 | 한국 |
| 시대 | 조선 |
| 왕대 | 광해군 |
| 집필자 | 성낙수 |
| 저편자 | 한교(韓嶠) |
| 간행처 | |
| 간행년일 | 1612년(광해군 4) |
| 권책수 | 1책 |
| 소장처 | 규장각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 연병지남(練兵指南) | |
1612년(광해군 4) 한교(韓嶠)가 지은 군사 훈련 방식에 대해 설명한 책.
개설
『연병지남(練兵指南)』은 1612년 한교가 지은 것으로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모두 36장이며, 1책으로 되어 있는데 함경도 함흥에서 목판에 새겨 인쇄하였다. 이 책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직후의 군사 훈련 상황을 볼 수 있는 역사자료이자, 근대국어의 역사가 비롯되는 17세기 초기의 언어자료로의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조총으로 무장한 총수, 활로 무장한 궁수, 등패와 도곤 등으로 무장한 살수로 각각 부대를 편성해 전투용 수레와 세트를 이뤄 싸우게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의 간행에 관한 기록으로는 책 끝에 “만력 40년 7월 상완에 체부표하 서북 교련관인 부사과한교가 함산의 풍패관에서 씀(萬曆四十年七月上浣 體府標下西北敎練官 副司果 韓嶠書于咸山之豊沛館)”이라고 적힌 것이 전부이다. 여기 등장하는 한교는 성리학자로서 군사학도 연구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1648년(인조 26)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낭청(郎廳)을 지낸 한교가 분명하다. 그의 자는 자암(子仰), 호는 동단(東潭)이고, 본관은 청주이며, 한명회(韓明澮)의 5대손이다. 그는 당시 조정의 명을 받아 명(明)나라 진영에 드나들며, 명나라의 전술을 학습하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무예제보(武藝諸譜)』, 『연병지남(練兵指南)』 등을 지었다.
서지 사항
총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규장각에 소장 중이다.
구성/내용
임진왜란 직후인 1603년(선조 36)부터 조선의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던 여진족의 위협이 가시화됐다. 이런 환경에서 전차를 중심으로 여진족 기병에 대항하는 전법을 담은 연병실기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교는 단순히 연병실기를 그대로 수용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최적화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물로 1612년에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명재상이었던 이항복(李恒福)이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純信)의 부하 장수로 활약했던 유형(柳珩) 등은 한교의 주장을 후원해 실제 전투용 수레 제작을 후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교가 남긴 『연병지남』에 담긴 전법들은 그가 남긴 다른 책들과 달리 조정의 공식적인 전법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다만 전투용 수레를 도입해 북방 기병에 대항하자는 주장 자체는 조선 후기 전 시기에 걸쳐 국방 분야의 핵심적인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연병지남』의 역사적 의의를 재확인할 수 있다. 한교의 사후에도 윤휴(尹鑴)나 18세기 말 양완(梁玩) 등은 전투용 수레가 기병을 막는 데 가장 적합한 무기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은 거기보대오규(車騎步隊伍規)·살수(殺手)·곤수(棍手)·도곤(刀棍)·궁수(弓手)·마병(馬兵)·거병(車兵)·중군(中軍)·명라(鳴羅)·호포(號砲)·명금(鳴金)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거기보대오규」는 기동성과 전투력의 비교에 따라 거병과 기병·보병의 편제를 정비하고 훈련하는 서차와 방법 등을 논술하면서 보병 중에서도 특수부대인 살수·곤수·도곤 등의 임무와 구실, 장점 등을 지적하고 후방에서 강력한 궁수부대의 지원을 주장하였다. 수레 하나에 일대를 기준으로 배치하며 그 가운데 포사수 4명씩 나누어 편승하게 하고 적과의 거리가 멀 때는 포수가 사격하고 가까우면 궁수가 사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밖에도 신호로 사용하는 명라·명금 등의 용도와 훈련 중에 귀에 익도록 숙련하여 실제의 전투에 사용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내용을 정리해보면, 첫째 거(車)·기(騎)·보(步)의 세 병과가 연합해서 벌이는 전투의 기본대형, 둘째 소규모의 전투 훈련방법, 셋째 이른바 ‘병농불분(兵農不分)’ 곧 군인과 농민이 따로 없는 실정에서 농한기와 농번기를 따라 효율적으로 농민을 동원해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문제 등에 관한 병무행정, 넷째 대규모의 전술적인 훈련방법, 다섯째 전거(戰車)의 제작방법들이 구체적으로 조리 있게 서술되어 있다고 하겠다. 끝으로 저자는 자기의 의견을 추가하여 군대는 국가의 큰일이므로 군대가 없으면 국가를 보전할 수 없고 농사가 없으면, 국민이 살아갈 수 없음을 강조하여 ‘군(軍)’과 ‘농(農)’이 동시에 발전하여야 됨을 역설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직후에 나온 것인 만큼 국방의 긴급함 때문에 여러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형편에서 서둘러 지어지고, 간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서문의 경우 발문도 없고 번역문이 달리지 않은 일부에는 제목도 붙지 않아서 체재가 불완전하며, 한글의 표기상태가 매우 혼란스럽다. 한글의 획이 떨어진 곳이 많고 번역된 용어에 통일성이 없으며 표기법 자체가 전혀 정비되어 있지 않다. 이 사실은 임진왜란 직후의 문헌에 널리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당시의 안정되지 못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표기상으로 ‘ㅂ’계 합용 병서와 ‘ㅅ’계 합용 병서가 모두 쓰이고 있는데, ‘고’에서의 ‘ㅂㅆ’, ‘며’의 ‘ㅅㅆ’, ‘’의 ‘ㅅㅎ’과 같이 매우 특이한 합용 병서가 나타나며, ‘’와 같이 ‘ㅲ’도 사용되고 있다. 한편 ‘두수의이셔(在兩車之間)’와 같은 예에서는 사잇소리 표기에 ‘ㅂ’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柄)’과 같이 ‘ㄹㄹ’이 ‘ㄹㄴ’으로 표기된 예가 일부 나타난다. 모음간의 ‘ㄹ’이 ‘ㄴ’으로 표기된 예도 꽤 많은데 ‘호녕은(號令)’과 같은 한자어나 ‘므늣(凡)’과 같은 고유어의 형태소 내부의 예도 있으나 대개는 ‘수, 소티기, 긔’ 등과 같이 목적격 조사의 예가 대부분이다.
음운상으로 ‘ㄷ’ 구개음화를 들 수가 있다. ‘혹디고당파도긔지라(或刺馬腹鈀手戳賊面)’의 ‘지-’와 같이 비록 한 예에 불과하지만 17세기초 함남 방언에서 ‘ㄷ’ 구개음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함경도 방언의 ‘ㄷ’ 구개음화 예는 1570년대에 간행된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에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거즛/거, 수/술의, 흔드러/흔러’에서와 같이 2음절 이하에서 ‘ㆍ’와 ‘ㅡ’가 구별되지 않는다.
이 외에 ‘홋초로(單)/호로(單)’와 같이 원순성 모음동화가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휘상으로는 ‘겨나가(馳出), 논화(分), 긔여(挑出), 긔를 흔드겨’ 등과 같이 방언적 특성을 보여주는 예들도 보인다. 또한 ‘흔드겨든(摔), 돏셔고(立定)’와 같은 특이한 단어들도 있는데 이들도 방언 어휘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3, 서울대학교, 1979.
- 안병희, 「한글판 『오대진언』에 대하여」, 『한글』195, 한글학회, 1987.
- 안병희,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92.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