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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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때 지은 악장의 하나로,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까지 6대의 행적을 그 내용으로 하는 서사시.

개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할 때, 훈민정음의 권위와 품격을 위하여 조상과 국가에 바치는 뜻을 바탕으로 세종의 6대 조상(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성덕을 칭송하는 가사(歌詞) 125장을 담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목조가 터전을 닦음에서부터 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태종 등 6대 조종(祖宗)의 용잠 때 공덕을 노래하고, 화가위국(化家爲國)의 극난을 들어 뒷 임금들의 거울을 삼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동시에 고려의 실덕과 조선의 성덕을 말하며, 고려를 쓰러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은 천명(天命)에 따른 혁명으로 신하로서의 반역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1장과 제2장은 서론격인 노래이고, 제3장부터 제109장까지는 건국의 수고와 이씨(李氏)가 대대로 덕을 쌓아 천명과 인심이 여기에 모였다는 사실을 중국과 고려조의 역사를 끌어다가 되풀이하여 읊은 것이며, 제110장부터 제125장까지는 뒷 임금들을 훈계하는 노래이다. 한글을 주문으로 하여 먼저 썼으며, 그 다음에 한문 번역을 붙였다.

편찬/발간 경위

세종의 명에 따라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등이 편찬에 착수하여 1445년(세종 27) 4월에 본문인 가시(歌詩)를 완성하였다.(『세종실록』 27년 3월 1일) 세종이 이를 두루 살펴본 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 명명하였고, 다시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강희안(姜希顔), 신숙주(申叔舟), 이현로(李賢老),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신영손(辛永孫) 등에게 주해를 덧붙이게 하여 1447년(세종 29) 2월에 완성하였다.

서지 사항

총10권 5책이며, 지질은 한지이다. 목간본으로, 책의 크기는 가로 23.1㎝, 세로 30.0㎝이다. 1447년 완성된 후 그해 10월 16일 군신에게 내려주었는데,(『세종실록』 29년 10월 16일) 현재 원간본으로 보이는 책은 서울대학교 가람문고(嘉藍文庫)에 권1, 2가 있다.

현존하는 『용비어천가』는 여러 가지 목판본이 있다. 고판본(古版本)으로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와 규장각(奎章閣) 등에 소장되어 있다. 가람문고의 소장본은 권 제1, 2의 제1책뿐이며, 규장각의 소장본은 10권 5책으로 되어 있으나 제3책에 묶여진 권제6의 일부가 불탄 한 종류와 권제5, 6의 제3책이 없어진 한 종류로 총 두 종류가 있다. 이 밖에 고려대학교 만송문고(晩松文庫)에 권제1, 2와 권제 5,6,7,8,9,10 등 4책이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은 1612년(광해군 4), 1659년(효종 10), 1765년(영조 41)의 간본이 있는데, 광해본은 고판본을 복각한 것이다. 효종본은 광해본을 좇아 중간한 것인데 고친 데가 더러 있으며, 영조본은 효종본에 좇아 새로 새긴 판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광해본 권제1,2의 제1책과 권제5,6의 제3책 등 2책이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구성은 권두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정인지의 「용비어천가서(龍飛御天歌序)」와 의정부 우참찬권제·정인지, 공조 참판(參判)안지 등의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이 있다. 본문이 끝난 다음 권말에 집현전(集賢殿) 응교(應敎)최항(崔恒)의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이 붙어 있다.

『용비어천가』의 본문은 가사 125장 모두를 10권으로 나누어 편찬한 다음 2권씩을 각각 1책으로 묶어 모두 5책으로 만들었다. 권제1은 제1장부터 제9장까지, 권제2는 제10장부터 제12장까지, 권제3은 제13장부터 제17장까지, 권제 4는 제18장부터 제26장까지, 권제5는 제27장부터 제40장까지, 권제6은 제41장부터 제49장까지, 권제7은 제50장부터 제58장까지, 권제8은 제59장부터 제77장까지, 권제9는 제78장부터 제97장까지, 권제10은 제98장부터 125장까지이다.

그리고 그 제1장은 3구(句)가 1연으로 되고, 마지막 125장은 9구가 1연으로 되었다. 제2장부터 제109장까지는 4구가 두 줄을 이루고, 각 줄 4자 4구의 한시(漢詩 : 번역시)인 4언체로 이를 두 줄로 하여 번역(한역)하였으며, 제110장부터 제124장까지는 3구가 두 줄을 이루고, 각 줄 5자 3구의 한시인 5언체로 이를 두 줄로 하여 번역하였다. 그 다음에 사실(史實)의 출처를 주(註)로 달고, 이에 대한 주석을 세자 쌍행(細字雙行)으로 풀이하였다. 또 가사 편찬은 제1장과 제2장 및 제86장~제89장을 제외한 제3장에서 제109장까지에는 첫 줄에는 중국 고대국가였던 주(周)나라를 비롯하여 한(漢)·당(唐)·송(宋) 등의 고사를 들었다. 다음 줄에는 우리나라의 여섯 임금, 즉 목조·익조·도조·환조까지의 4대와 태조·태종 양대의 업적을 들어 이에 대응하게 하였다. 본주(本註)에서는 가사에 쓰인 사적(史籍)을 설명하고, 협주(夾註)에서는 주로 음과 뜻을 설명하였으며, 본주를 더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를 좀더 소상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은 가사를 지은 의도를, 제2장은 연원과 뿌리가 깊어야 나라가 튼튼함을, 제3장부터 제8장까지는 태조의 선조인 목조·익조·도조·환조에 대한 사적을, 제9장부터 제89장까지는 임금으로서의 태조 인품과 영웅적인 행동을 읊었다. 그 가운데 제9장부터 제14장까지는 이성계(李成桂)가 정의를 부르짖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감행한 것부터 <한양 천도>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노래하고, 제27장부터 제89장까지는 태조의 성문신무(聖文神武)한 자질과 남정북벌(南征北伐)에 관한 칭송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제86장부터 제89장까지는 중국의 역사를 앞세우는 격식을 깨고 이성계에 대한 칭송으로 일관하였음이 특이하다. 제90장부터 제109장까지는 태종의 신공(神功)과 위열(偉烈)에 대한 찬사를 노래하였고, 제110장부터 마지막장인 제125장까지는 뒷세대의 임금들로 하여금 선조(先祖)들의 어려웠던 창업을 명심하여 인정(仁政)을 베풂으로써 국조(國祚)를 자자손손 전하도록 경계하는 뜻을 노래로 읊으며 끝맺었다.

이 책의 한글 가사의 표기법은 한자말은 한자로 쓰고 우리말은 훈민정음으로 쓰되, 언어의 표기법에 있어서도 『석보상절(釋譜詳節)』 등과 달리 8종성(ㄱㄴㄷㄹㅁㅂㅅㅇ) 외에 ‘ㅿㅈㅊㅍ’의 낱자를 종성(받침)에 더 사용하였고, 사잇소리 6개(ㅅㄱㄷㅂㆆㅿ)를 사용하였다. 순경음(脣輕音) ‘ㅸ’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전체 문장은 철저히 연철(連綴) 표기로 되었다. 이 책의 한글 자형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東國正韻)』과 비슷하나, 중성(中聲)의 ‘ㆎ’와 같이 동그란 점이 바뀌어 ‘ㅗ,ㅏ,ㅜ,ㅓ…’로 된 점이 다르다.

『용비어천가』의 또 하나 중요한 가치는 음악 연구 자료라고 하겠다. 『용비어천가서』에서 “거의 아송의 유음을 이어서 관현에 올려 끝없이 전하면서 보여주는 것이, 이것이 신들의 절실한 소원입니다.[庶繼雅頌之遺音 被之管絃 傳示罔極 此臣等之至願也]”라고 한 것과 「진용비어천가전」에서 “신들은 조전의 재주로써 외람되게 문한의 임무를 더럽혀 삼가 민속의 칭송하는 노래를 캐 모았으니 감히 조묘의 악가에 비기오리까?[臣等 俱以彫篆之才 濫叨文翰之任 謹採民俗之稱頌 敢擬朝廟之樂歌]”라고 함과 같이 『용비어천가』를 풍류의 악가(樂歌)로써 영구히 전하려 하여 『세종실록(世宗實錄)』 권제140에서부터 권제145까지 실린 「악보편(樂譜篇)」 봉래의(鳳來儀)의 악보 중 『여민락보(與民樂譜)』에는 『용비어천가』 한역시 125장 중에서 제1·2·3·4·125장인 5장을 가사로 붙이고, 『치화평보(致和平譜)』와 『취풍형보(醉豊亨譜)』에는 『용비어천가』의 한글 가사 125장 보두를 붙여 노래로 부르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용비어천가』는 새 글자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반포되기 1년 전인 1445년(세종 27)에 가사가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시험해 보기 위한 첫 작품이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그 가치는 매우 크니, 고유문자인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최초로 만들어 간행된 운문(韻文) 문헌으로 그 노래는 우리 국문학상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그 풍부한 어휘와 쓰인 솜씨 등은 조선 초기의 언어 연구와 맞춤법 및 말본[文法]은 물론 한글 글자체 연구에도 귀한 자료가 되며, 한글 가사와 주해에 나타나는 역사 사실 기록, 특히 고려 말 조선 초에 걸친 동북쪽의 여진(女眞) 등과의 관계나 왜구의 침공에 대한 기록 등은 역사 연구에서도 빠지지 않는 자료이다. 많은 지명이 우리 토박이말로 달려 있으므로 땅이름 연구에서 역시 많은 참고가 되니 지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또 『세종실록』에 『용비어천가』의 서(序)와 한역시 125장 전부를 실어 세종 때에 이루어진 조정의 공업을 노래한 악장임을 보였다. 이는 국악 연구에 값진 자료이다.

참고문헌

  • 『용비어천가』
  • 『세종실록(世宗實錄)』
  • 김석득, 『우리말 연구사』, 정음문화사, 1983.
  • 김윤경, 『한국문자급어학사』, 동국문화사, 1954.
  • 김윤경, 『용비어천가 강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 박종국, 「용비어천가 해제」, 『세종학연구』4, 1989.
  • 박종국, 『한국어발달사』, 문지사, 1996.
  • 박종국, 『세종대왕기념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 박종국, 『한글문헌해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3.
  • 박종국, 『한국어발달사증보』, 세종학연구원, 2009.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3, 1979.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
  • 허웅, 『한글과 민족문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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