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2일 (금) 01:20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성종 때에 편찬된 지리서.

개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성종 때에 편찬된 지리서다. 성종 때 명나라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수입되자, 왕이 노사신ㆍ양성지ㆍ강희맹 등에게 그것을 참고하고, 세종 때의 『신찬 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지리서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들은 1481년(성종 12)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에 다시 증산(增刪)ㆍ수정하여 35권을 간행하였다.

동국(東國)은 중앙(中)에 있는 나라(國)인 중국(中國)의 동(東)쪽에 있는 나라(國)라는 의미이니,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를 말한다. 여지(輿地)는 수레 여(輿)자와 땅 지(地)자가 합쳐진 글자로 만물을 싣는 수레와 같은 땅이라는 뜻으로 지구나 땅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여지(輿地)’가 들어간다.

조선 시대 발간된 모든 지리서에는 여지(輿地)라는 말이 들어간다. ‘승람(勝覽)’은 ‘이길 승(勝)’자와 ‘볼 람(覽)’자가 합쳐진 글자다. 여기서 ‘승(勝)’자는 명승지(名勝地: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를 줄인 말이고, ‘람(覽)’자는 유람(遊覽)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승람(勝覽)’은 ‘명승지(名勝地)를 유람(遊覽)한다’는 뜻이다.

편찬/발간 경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성종 때에 노사신 등이 각 도의 지리, 풍속 등을 기록한 관찬지리지다. 따라서 수령이 새로 부임을 함에 따라, 해당 지역의 지리나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1481년(성종 12)에 성종(成宗)의 명에 따라 노사신(盧思愼), 양성지(梁誠之), 강희맹(姜希孟) 등이 편찬한 지리지(地里誌)이다.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더불어 조선성종 시대에 이루어진 편찬 사업의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조선 전기에는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면서, 각 지역의 역사와 산물, 풍속 등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지리지 편찬이 국가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다. 세종 때인 1432년(세종 14)에 맹사성(孟思誠), 윤회(尹淮), 신장(申檣) 등이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 등이 이것의 수정과 보완에 착수하여, 성종 때인 1477년(성종 8)에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완성하였다. 성종은 1479년(성종 10)에 『팔도지리지』를 토대로 『동문선(東文選)』 등에 수록된 문사(文士)들의 시문(詩文)을 첨가하여, 각 도의 지리와 풍속 등을 정리하도록 명했고,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된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었다.

그 후 1499년(연산군 5)에 개수(改修)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전55권 25책으로 각도의 지리를 수록하였는데 그 첫머리에 도별 전도를 싣고, 도의 연혁ㆍ풍속ㆍ묘사(廟社)ㆍ능침(陵能)ㆍ궁궐ㆍ관부(官府)ㆍ학교ㆍ토산(土産)ㆍ효자ㆍ열녀ㆍ성곽ㆍ산천ㆍ누정(樓亭)ㆍ사사(寺社)ㆍ역원(驛院)ㆍ교량(橋梁) 및 명현(名賢)의 사적(事蹟), 시인(詩人)의 제영(題詠) 등을 실었으며, 이행 등의 진전문(進箋文), 서거정 등의 서문, 김종직 등의 발(跋)이 수록되어 있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계축자본(癸丑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7cm, 가로 22cm이며,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전국을 양경(兩京) 8도(八道)로 나누어 한성부(漢城府)와 개성부(開城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경도(京都)의 첫머리에 ‘팔도총도(八道總圖)’를 첨부하고, 각 도(道)의 앞에도 도별 지도를 수록하여, 공간적인 이해를 도우려 하였다. 각 도별로는 연혁과 관원, 풍속, 형승(形勝), 물산, 사묘, 인물 등이 조목별로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동국여지승람』의 편찬 체제는 남송(南宋)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明)의 『일통지(一統志)』를 참고하여, 나타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은 편찬된 뒤에 교정과 증보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성종 때인 1485년(성종 16)에는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연혁과 풍속, 인물 등에 대한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 때 성씨와 봉수, 고적 등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도 임사홍(任士洪)ㆍ성현(成俔) 등에 의해 2차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중종 때인 1530년(중종 25)에는 이행(李荇), 윤은보(尹殷輔), 홍언필(洪彦弼) 등에 의해 55권으로 된 증보판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앞에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기술한 뒤에 새로 증보된 내용을 각 항목의 끝에 ‘신증(新增)’이라고 밝히며 덧붙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은 조선 초기 세종ㆍ문종ㆍ단종ㆍ세조ㆍ예종ㆍ성종의 6대 왕조를 거치면서, 군주의 신임을 두터이 받은 양성지였다. 그는 조선 초기 훈구파들 중에서도 변계량과 함께 가장 강력한 자주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주의적 역사인식과 지리인식을 바탕으로 천제(天祭)에 대한 거행을 주장하는 등 자주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양성지는 단군을 신화 상의 인물로 파악하지 않고, 실제 인물로 파악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역사의 시작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도 중국처럼 제천 행사를 단독적으로 치르자고 함으로써 중국에 예속되지 않은 자주 독립 국가임을 강조하였다. 지리에서는 요동에 이루는 광활한 영토가 우리의 땅임을 강조하면서 언젠가는 수복할 지역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양성지의 역사ㆍ지리ㆍ문화의 자주적 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수찬과 한 차례에 걸친 신증으로 인하여 양성지의 자주의식을 부분적으로밖에는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 김정희,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전기까지의 불화」, 『강좌 미술사』 2권, 한국미술사연구소, 1989.
  • 문명대, 「『동국여지승람』과 미술사」, 『강좌 미술사』 2권, 한국미술사연구소, 1989.
  • 서인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체재와 특징에 대한 일고찰」, 『역사와 실학』 제12집, 역사실학회, 1999.
  • 이태진, 「《동국여지승람》 편찬의 역사적 성격」, 『진단학보』 46ㆍ47권, 진단학회, 1979.
  • 이태진, 「15세기 후반기의 ‘거족’과 명족의식- 『동국여지승람』 인물조의 분석을 통하여」, 『한국사론』3권, 서울대학교,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