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통록(理學通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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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이 주희(朱熹)를 비롯한 송ㆍ원ㆍ명 대의 주자학자들의 행장ㆍ전기ㆍ어록 등을 서술한 책.

개설

『이학통록(理學通錄)』은 이황(李滉)이 주희(朱熹)를 비롯한 송ㆍ원ㆍ명 대의 주자학자들의 행장ㆍ전기ㆍ어록 등을 서술한 책이다. 조목(趙穆, 1524∼1606)의 발(跋)에 의하면, 원래 제목은 ‘송원록(宋元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줄여 『이학통록』으로 불린다. 이황은 서(序)에서 저술의 목적을 그 사람을 이해하여, 도학의 요지를 밝히는 데 있다고 하였다. 본집에는 주희와 그 문인 및 사숙제자(私淑弟子) 등의 주자학자를, 외집에는 육구연(陸九淵) 등 비주자학자들을 실었다.

편찬/발간 경위

1576년(선조 9) 조목 등이 안동에서 초간하였고, 1743년(영조 19)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중간하였다. 이황(李滉)의 제자인 조목(趙穆)이 1576년에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원래 송ㆍ원 부분은 이미 이황 생존시에 완성되어, 서문(序文)까지 갖추어져 있었으나, 외집이 탈고되지 못했기 때문에 간행되지 못하였던 것을 퇴계 사후 문인들이 강론의 여가에 질의(質疑)한 것 중에서 뽑아 한 곳에 모으고, 다음해부터 전록(傳錄)하기 시작하여, 사후(死後) 5년(1575)에 안동에서 간각을 시작하여, 이듬해 조목의 발문을 붙여 간행하였다.

서지 사항

11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2.9cm, 가로 20.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명대 가정(嘉靖) 38년 기미(己未) 12월(조선명종(明宗) 14년), 즉 1560년 1월에 이황은 400여명의 주희(朱熹, 1130~1200)의 제자나 가까운 동료를 실은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송말에서 명대까지의 신유학자들의 총개관(總槪觀), 이후로는 통록(通錄)이라 약칭함)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책 이름이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 퇴계의 찬본(撰本)은 송ㆍ원록(宋ㆍ元錄)으로서, 많은 비중이 송ㆍ원에 두어지고, 명대에는 단지 하의려(賀醫閭) 1인만이 등재되어 있다. 이것은 명대 부문에는 이미 월호(月湖)양렴(楊廉)이 편집한 『황명이학명신행록(皇明理學名臣言行錄)』이 합간(合刊)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의려(賀醫閭) 외에 명대 사람으로 부록에 나흠순(羅欽順) 및 조단(曹端)의 약전(略傳)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마땅히 하의려 뒤에 부재(附載)돼야 할 것인데, 첫 부분에 부(附)로 편입한 것은, 원래 퇴계의 원고에서 별지(別紙)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사(先師)의 유문(遺文)을 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전(賀傳) 뒤에 붙이기도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조목은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는 나흠순의 소저(所著)인 『곤지기(困知記)』 한 책은 겉으로는 정주(程朱)를 받들고 있으나, 속으로는 파괴시키기 때문에 퇴계 자신도 만년에는 나의 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하전(賀傳) 뒤에다가 붙일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결국 외집을 따로 떼어, 권말(卷末)에 부재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퇴계의 이 책의 찬집동기를 규지할 수 있는 것이다. 외집에는 육구연(陸九淵) 일파를 위시하여, 제파의 학자들을 등재시키고, 여삼겸(呂祖謙)은 아예 등재되어 있지 않다. 남헌문인(南獻門人)을 본집에 현출(顯出)시키고, 그 안어(按語)에서 ‘주장이선생 본동도 고범유주자서자 불구타문록지(朱張二先生 本同道 故凡有朱子書者 不拘他門而錄之)’라고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결과는 여조겸(呂祖謙)이 주희 공편한 『근사록』이 주희의 저작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여조겸과 주희 문인들의 대립에서 연유된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인 영가(永嘉)의 진전량(陳傅良)이 여조겸과 마찬가지로 등재되어 있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전12권 중 권수(卷首)에 목록과 부(附), 소서(小敍), 조목(趙穆, 1524~1606)의 발이 있고, 주희를 비롯하여, 송말(宋末) 주희의 문인제자(門人諸子)의 언행록을 전(前) 8권에 수록, 8권에는 장남헌(張南獻)의 문인이 합재(合載)되었으며, 9권에는 사숙제자(私淑諸子)를 수록하였다. 10권과 11권에는 각각 원(元)의 제자(諸子)와 명(明)의 제자(諸子)를 기록하였으며, 마지막 권은 외집(外集)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송말의 제자(諸子)를 수록하였다. 내용은 주로 각 문인(門人)ㆍ제자(諸子)의 약전(略傳)이 기재되어 있으며, 주자학의 전개과정이라는 맥락에서 관련 자료를 취사, 선택하였다.

외집을 따로 묶은 것에 대해서, 조목은 그 이유를 이들이 이학(理學)이라는 이름만 취했을 따름이지, 실제로는 이교(異敎)에 실함(失陷)된 자들이기 때문에 별도로 묶어, 후학들에게 권계(勸戒)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외집의 권말에서는 그들은 병들고 보잘 없지만, 행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가졌기 때문에 외집에 편입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송대의 여조겸ㆍ진전량, 나아가서는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평가가 이 책에서 어떠한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이와 같이 『이학통록』의 편찬동기는 주자학의 정통을 중시하고, 공고히 그 토대를 굳히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미 성서(成書)가 되어, 간행된 주자학 관계의 서적에서 수다하게 보이는 문인들의 행적을 분류 정리함으로써, 학문적인 연구에서 기반을 마련코자 하는 의미에서 찬집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강경헌, 「퇴계 이황의 ‘이발(理發)’과 ‘이자도(理自到)’에 대한 연속적 이해」, 『철학논집』 제40,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
  • 우정임, 「『미암일기』를 통해 본 유희춘의 서적교류와 지방판본의 유통」, 『지역과 역사』 제26호, 부경역사연구소, 2010.
  • 퇴계학총서편간위원회 편, 『퇴계전서』, 퇴계학연구원, 1989.
  • 황병기, 「퇴계 이황의 주역학周易學과 『주역석의周易釋義』」, 『국학연구』 제25집, 한국국학진흥원, 2014.